p.105
명량에서, 나는 이긴 것인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이 명량으로 몰려왔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이 명량에서 죽었다. 남동 썰물에 밀려갔던 적의 시체들이 다시 북서 밀물에 밀려 명량을 뒤덮었다.
죽을 때, 적들은 다들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선이 깨어지고 불타서 기울 때 물로 뛰어든 적병들이 모두 적의 깃발 아래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죽어서 물 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 적어도, 널빤지에 매달려서 덤벼들다가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 들의 살아 있는 몸의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몫들은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이었다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몫이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끝은 적막했고, 적막한 끝들이 끝나서 쓰레기로 바다를 덮었다. 그 소통되지 않는 고통과 무서움의 운명 위에서, 혹시라도 칼을 버리고 적과 화해할 수도 있을 테지만 죽음은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적의 적이었으며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나는 칼을 차고 있어야 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
p.119
면의 부고를 받던 날, 나는 군무를 폐하고 하루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환도 두 자리와 면사첩이 걸린 내 숙사 도배지 아래 나는 아루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잠들어 바다는 고요했다. 덜삭은 젖내가 나던 면의 푸른 똥과 면이 돌을 지날 무렵의 아내의 몸냄새를 생각했다. 쌀냄새가 나고 보리 냄새가 나던 면의 작은 입과 그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생각했다. 날이 선 연장을 신기해하던 면의 장난을 생각했다. 허벅지와 어깨에 적의 칼을 받고 혼자서 죽어갈 때의 면의 무서움을 생각했고, 산 위에서 불타는 집을 내려다보던 면의 분노를 생각했다. 쓰러져 뒹굴며 통곡하는 늙은 아내를 생각했다. 나를 닮아서, 사물을 아래에서 위로 빨아당기듯이 훑어내는 면의 눈동자를 생각했고, 또 내가 닮은 내 죽은 어머니의 이마와 눈썹과 시선을 생각했다. 젊은 날, 국경에서 돌아와 면을 처음 안았을 때, 그 따스한 젖비린내 속에서 뭉클거리며 솟아 오르던 슬픔을 생각했다. 탯줄에 붙어서 여자의 배로 태어나는 인간이 혈육의 이마와 눈썹을 닮고, 시선까지도 닮는다는 씨내림의 운명을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송장으로 뒤덮인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그 씨내림의 운명을 힘들어하는 내 슬픔의 하찮음이 나는 진실로 슬펐다.
몸 깊은 곳에서 치솟는 울음을 이를 악물어 참았다.(...)
나는 소금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
p.195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 때, 나는 죽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고 나는 늘 살아 있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각오되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삶을 버린 자가 죽음을 가로지를 수는 없을 것이었는데, 바다에서 그 경계는 늘 불분명했고 경계의 불분명함은 확실했다. 길고 가파른 전투가 끝나는 저녁 바다는 죽고 부서져서 물에 뜬 것들의 쓰레기로 덮였고 화약 연기에 노을이 스몄다. 그 노을 속에서 나는 늘 살아 있었고, 살아서 기진맥진했다.
p.245
나의 적은 전투대형의 날개를 펼치고 눈보라처럼 휘몰아 달려드는 적의 집단성이기에 앞서,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적의 개별성이었다. 그러나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개별성의 울음과 개별성의 몸이 어째서 나의 칼로 베어 없애야 할 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적에게 물어보다도 적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임진년의 여러 연안 포구의 골짜기와 갯벌에서, 배가 깨어져 육지로 달아난 적들은 무수히 뒤엉켜 울었다. 썰물이었으므로 뭍까지 쫓아올라가서 죽이지는 못했다. 부대를 잃고 퇴로를 잃은 적들은 갯벌의 바위틈이나 물고랑에 게처럼 모여서 울었다. 무수한 적들이 울어대는 울음소리는 여름날 논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처럼 서로 비벼지면서 갯벌을 넘어왔다. 그때, 적들은 죽기로 작정한 자들처럼 필사적으로 울었다. 적의 울음의 기세는, 내 함대의 정면으로 들이닥치던 적의 공세를 닮아 있었다. 그 울음은 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울음을 모두 소진한 뒤에, 울음의 끝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의 맹렬한 울음이었다.
p.320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 · · · · · 이처럼 · · · · · · 가볍고 · · · · · · 또 · · · · · ·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 · · · · ·.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 · · · · · 이 세상에 남겨놓고 · · · · · · 내가 먼저 · · · · · ·, 관음포의 노을이 · · · · · · 적들 쪽으로 · · · · · ·
☆미쁨책방 이야기
나에게는 다소 생소한 시대적 단어들로 인해 읽는데 어려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건 나의 부족함이니 차치하고~
충무공 이순신이 무관으로서 겪는 내면의 감정과 한 인간으로서의 혼란을 깊이 있게 묘사한 책이었다.
(※ 멋진 작품에 대한 리뷰를 잘 쓰기 위해서는 재정독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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