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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격_페터비에리

☆북리뷰

by mibbm_soo 2024. 2. 1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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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p.25

우리가 하나의 주체로서 갖는 자화상은 현재 우리의 모습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 모습도 해당된다. 주체가 가진 능력에는 스스로를 평가 대상으로 삼고 행동과 경험이 만족한 만한 것인지, 즉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 내쳐야 할 것인지 자문하는 일련의 과정도 포함된다. 현재 존재하는 모습과 되고 싶은 모습 사이의 갈등을 체험하는 것, 되고 싶은 대로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도 주체가 가진 본질이다. 그로므로 주체로서의 인간은 내적 검열을 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자신의 행위와 사고, 희망, 공상을 금지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이 능력의 원천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능력이다. 주체적 인간은 내적 갈등을 안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의 행위와 경험을 존중할 것인지 무시할 것인지 자문할 줄 알아야 한다.

주체적 인간의 특징은 무엇에 끌려가는 것처럼 그저 앞만 보고 터덜터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품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문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주체적 인간은 의심의 여지를 가지고 자신을 돌아볼 뿐 아니라 계획을 갖고 자신과 자신의 행동에 대해 영향을 미쳐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온갖 경험의 희생양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한 걸음 떨어져서 새로운 사고와 희망과 감정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숙고하고 그 방향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 함께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적 정체성을 갈고 닦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177

존엄성은 인간관계를 통해 내가 변할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와, 필요하다면 끝낼 수 있다는 각오를 의미하기도 한다. 타인에게 허락하고 나 자신에게도 요구하는 열린 미래와 진실하고 깊이 있는 관계에 필수 불가결한 상대에 대한 충실성, 이 두가지 사이에는 긴장과 충돌이 존재한다. 언제나 상대방의 영혼 편에 서는 충실성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충실성과 열린 미래, 우리는 이 두가지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p.245

"그렇다면 존엄성은 무엇인가?"

"사적인 것에 대해서 말을 아낌으로써 타인과의 사이에서 유지되는 간격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간격이 필요한 이유는, 침묵의 경도를 조금 무르게 함으로써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리처럼 투명하다면 친밀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좁혀야 할 거리라는 것이 애초부터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다 알고, 그중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으로 이야기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결국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 밖에 될 수 없다. 친밀성이 자아내는 신비한 마법도, 마법이 만들어내는 행복도 없다."

p.261

솔직함을 바란다는 것은 서로 간의 이해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친밀감에 대한 소망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자기 자신과 삶과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며 이해하고 싶어 한다.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는 1차적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의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에 의지한다. 그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아닌 태도도 감지한다. 뭔가를 겁내고 있다든가 부끄러움이나 원망 같은 것은 말이 없이도 표현될 수 있다. 상대방과 인생을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말과 행동, 자아상과 사실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을 더 명확히 느끼게 된다. 친밀감이 늘어날수록 자기기만을 발견할 기회도 똑같이 많아진다.

가까운 사이란 자신이 이해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범위를 조금씩 줄여가는 사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생기가 돌고 발전적인 관계가 아닌 정체와 단조로움에 휩싸인 관계로 머물고 만다. 이것이 바로, 혹시 삶의 기만하는 거짓이 느껴진다고 생각될 때 상대방에게 대화를 청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p.312

마지막으로 다룰 또 다른 차원의 자아 존중은 인생을 살아나가면서 정신적 정체성이 변화를 거듭한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베른하르트 빈터에게 작가 친구가 한 명 있다고 가정해보다. 그는 자기가 쓴 작품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중에 판매되는 그 작품을 모조리 사들인다.(...)

베른하르트는 친구에게 말한다.

"이봐, 마르틴. 과거의 자네도 역시 자네야. 그래, 자네 생각은 다를 수 있어. 자신이 썼다는 이유로 옛날의 글들이 창피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편을 가르고 부정하는 것은 해답이 될 수 없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쓴 것을 좋아해야만 하는 이유를 자네는 찾아야 하네. 자네 자신을 격려하고 스스로의 편이 되어야 해.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변화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자네를 말이야. 과거의 자네가 지금과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가졌던 것, 그리고 그것이 변해 지금의 생각과 느낌이 된 것, 이 모두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네. 여기에는 우리가 이해해야 할 무언가가 있어. 과거에 흐르던 삶의 가락이 현재의 가락이 된 것, 이것은 나름의 논리를 가진 내적 사건으로 인한 것이야.(...) 이 내적 변화를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며 삶의 일부분으로 인정할 수 있다네.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인정하는 것. 그런 다음에 세상을 향해 얼굴을 돌려 이렇게 외치는 거라네. 그래, 다 내가 했어! 아니, 더 좋은 건 이렇게 외치는 거야. 이 모든 것이 내 모습이야!"

p.321

도덕적 의식 안에서 자기 결정권과 도덕적 친밀성, 이 두 가지는 한 줄기가 되어 흐른다. 이들 둘이 합쳐져 도덕적 행위의 가치를 형성한다. 둘은 함께 나타날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깊숙하게 관여되어 있다. 도덕적 친밀성은 자유의 표현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되며, 우리가 특정한 것을 포기하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 친밀성을 가진 특별한 친근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도덕적 친밀성은 단지 관념적인 것으로만 인식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직접 체험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가 도덕적이라는 것은 무언가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근거를 바로 이 체험된 맥락일 것이다. 왈가왈부하는 대신에 간단하게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바로 이런 체험에서 나온 것을 바탕으로 살아가려 한다고, 그것이 소중하고 바람직하고 행복하게 인생을 사는 방법이기 때문일나고,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기 때문이라고.

p.403

우리는 자아를 잃어버린 자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을 밀어내어서도 안 되고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어서도 안 된다.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그들을 독립적 인간으로 대하며 스스로의 삶을 운영할 수 있도록 능력을 자극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단 몇 시간이나 며칠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비록 점점 더 힘들어지고 실패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의 독립성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그들이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스스로의 자립성에 대한 감각이 결코 완전히 없어지도록 놓아두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상실의 정도가 많이 진행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기를 대할 때처럼 말한다거나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매우 좋지 않다. 그들의 존엄을 지켜준다는 것은 그러한 취급에 반대해 적극적으로 맞선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들이 말이 어눌하고 이상하다고 해도 그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는 말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빠뜨리면 안 된다. 반대 의견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을 대화 상대로 인정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과 마음을 함께 한다는 것, 유한한 인간들끼리의 연대감을 그들이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들에게 닥친 일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존엄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다. 그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것이다. 다른 연결 고리가 모두 다 무너졌다고 해도, 굳이 말하지 않고 함께 웃는 가운데 인간의 소중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미쁨책방 이야기

책을 구입한 후 오랫동안 잘 읽히지 않아 다른 책을 보다 다시 마음을 잡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 겨우 다 읽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심오하고 철학적인 내용이 많아 한 문장 한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며 읽기에는 다소 난해한 면이 있었다(물론 나의 기준에서···).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통해 '자신과 그리고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보다 넓혀줄 수 있는 책'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어쩌면 타인에 대한 비판과 시기, 이기심, 멸시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같은 시대를 사는 공동체적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할 권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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