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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_박연준 산문집

☆북리뷰

by mibbm_soo 2024. 6. 9. 15:06

본문

p.34

하필(何必), 이라는 말

(...)

이제 나는 사랑이 흙속 깊이 손을 파묻어 뿌리로 삼고, 스스로 나무가 되어 피어나는 일이라 믿지 않아요. 그런 사랑은 평생에 딱 한 번뿐일 테니까요. 그보다 사랑은 연약한 뿌리, 공중에서 부유하는 뿌리를 서로 보듬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의 뿌리는 아주 약하고 흔들리고 움직이기도 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잘 포개지면 그 뿌리를 공중에서도 오래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을래요. 그게 더 진짜 같아요. 누가 사랑을 한곳에 심을 수 있겠어요?

(...)

계절이 반복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여름이 가을에게 잡아먹히면 그다음은 차가운 미소를 짓는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안심하세요. 자꾸 잡아먹혀도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닐 거에요.

당신, 죽지 말아요. 생생하게 살아 나를 기쁘게 해주세요. 언제나 당신을 가슴 깊이에서 응원합니다. 항상 내 안부를 걱정해주는 당신, 내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에 당도해 있는 연인.

p.43

손톱 걸음

(...)

그를 생각하며 손톱 걸음을 걸을 때면, 모래알처럼 쏟아지고 싶었다. 모래는 흩어져 구르겠지만 한번 젖으면 깊이 무거워진다. 한 사람을 생각하며, 충분히 무거워질 수 있을까. 어느 만큼을 무겁다고 해야 하나? 손톱 걸음이 느려질 때 눈을 감으면, 대숲의 잎사귀들이 이런 노래를 불러줄 것 같다.

한 남자를 사랑하는 일은

그의 육체와 정신, 영혼뿐 아니라

장점과 강점, 눈부심이나 의협심뿐 아니라

비겁함과 비루함

어두운 미래와 헝클어진 과거,

때와 땀과 똥을

똑같이!

사랑하는 일이란다.

바다가 뒤척이는 것은 바다가 덜 무겁기 때문

사랑이 뒤척이는 것은 사랑이 덜 무겁기 때문

이런 노래를 지어 속으로 흥얼거려보며, 손톱 걸음을 걷는 날. 아무래도 한 남자를 생각하는 일은 그냥 그대로 충분히 좋은 일.

자주 그를, 바라보았다.

p.60

일곱 살 클레멘타인

(...)

1980년 10월 25일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나는 태어났다. 장담하건대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불안했다. 실제로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불안'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불안하다. 도대체 뭐가 불안한가. 라고 묻는다면 할말이 없다. 나 자체가 '불안'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신이 왜 사랑인지 모르고, 가난은 자신이 왜 가난인지 모르듯이, 불안은 자신이 왜 불안인 줄 모른다. 다만 뿌리에서부터, 가느다란 떨림이 엉켜 있을 뿐이다. 떨림, 내게 시는 항상 떨림으로 왔다.

p.81

서른

(...)

여전히 나는 작은 일에도 쉽게 화가 나 평정을 잃고 방방 뛸 때가 많지만 서른이 넘었으므로 이내 괜찮은 척, 기다리는 척한다. 마흔이 넘어서는 뭘 하는 척해야 하나? 쉰이 넘고 예순이 넘어서는? 중요한 건 생각은 갑자기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준비를 해야 어른인 '척'도 하고, 잘 사는 '척'도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안심시키는 '척'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쪼록 잘 사는 일이란 마음이 머물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 순간의 시간을 온전히 할애해주는 것일지 모른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삶이라면 될 수 있는 한 '잘 대접해서' 보내주고 싶다.

p.86

겨울 바다, 껍질

(...)

수평선처럼 길게 누워 흘러가는 일

우리는 저마다 작은 바다를 가지고 있다. 내 몸에 작은 바다가 살고 있음을, 그리하여 본능적으로 큰 바다와 함께 흐르고 싶어함을 알겠다. 감정이 격해질 때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 눈물로 짠 이유도 모두 바다 때문이다.

마음이 크게 휘어질 때나 폭풍처럼 달려가 어디 높은 벼랑에서 아래를 향해 훌쩍 뛰어내리고 싶을 때가 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몸속에 사는 작은 바다가 성이 나 요동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럴 때는 그냥 어디 평평한 곳에 누워 작은 바다가 얌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수평선처럼 길게 누워야 한다. 큰 바다와 합류하여 흘러가는 일을 상상해야 한다.

p.90

그보다 나는 안녕한지

(...)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진정으로 속상해하던 때가 언제지? 나는 우산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잃고 살면서도 멀쩡한 얼굴로 잘도 걸어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마음이 말랑했을 때 되풀이해 읽던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비밀을 가르쳐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건조한 세상에서 눈뜬 맹인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나는 안녕한지, 잘 지내는지, 자신이 없다.

p.183

슬픔은 슬픔대로 즐겁다

(...)

윤동주. 내가 슬픔에 젖어 있던 많은 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에 기대 꽤 오랜 시간을 견뎠었지. 박물관에 전시된 자료들을 보다 나는 어느 시 앞에서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피하고 싶어 오랜 시간을 공들였는데, 결국 만나버린 인연, 혹은 숙명 같았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 윤동주, 「팔복八福」 전문

(...)

사랑이 질병인 것처럼, 내 이십대는 질병과 같았다. 슬픔도 가장 격렬한 슬픔만, 아픔도 가장 치명적인 아픔만 골라 껴안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슬픔은 폭죽처럼 터져버렸고, 이미 사라졌다. 시간이 갈수록 폭죽에 대한 기억도, 귓가에 울리던 굉음도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한 시절 사랑한 것들과 그로 인해 품었던 슬픔들이 남은 내 삶의 토대를 이룰 것임을 알고 있다. 슬픔을 지나온 힘으로 앞으로 올 새로운 슬픔까지 긍정할 수 있음을, 세상은 슬픔의 힘으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이제 나는, 겨우, 믿는다.

슬퍼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을 것이고, 힘없는 자들을 가여워하지 않을 것이며, 나누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슬퍼하지 않으면 더이상 어떤 시나 노래도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믿어야 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픔은 슬픔대로 즐겁다!

p.9

개정판 서문 中

「소란」은 '어림'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책입니다. '어림'에는 여림, 맑음, 유치, 투명, 슬픔, 위험, 열렬, 치졸, 두려움, 그리고 맹목의 사랑 따위가 쉽게 들러붙죠.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비껴 앉게 되는 것, 피하거나 못 본 척하거나 떨어뜨려 두려고 하는 것들이요. 진짜 삶은 '어림'이 깃든 시절에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어림에서 멀어집니다.

저는 '어림'을 아낍니다. 높고 싶지 않아요. 늙어 죽을 때가 되어도 몸 어느 구석에서 여전히 '어림'이 붙어 있길 바랍니다. "어린애같이 왜 저런담", 끝내 이런 말을 듣고 싶어요.

당신이 '어림의 시절'을 지나고 있다면, 모든 '어림'을 애틋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돌보듯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어림을 돌보듯이.

 

☆미쁨책방 이야기

책 속의 내용이 맞다면 작가는 나와 동갑내기다. 이 책을 썼을 당시는 아마 30대 초반 즈음의 나이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지금은 40대 중년의 시기를 지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나는 작가의 글들 속에서 나의 20대, 그리고 30대를 보았고 또 40대가 된 시점에서의 내가 보였다. 추억 속의 사건과 그 기록에는 차이가 있지만 틀림없는 사실은 그때와 지금의 나의 뿌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뿌리는 굵어져 나의 소신은 더욱 강해졌고, 굳이 화나 슬픔이나 괴로움이나 불안을 드러내봐야 바뀔 것이 없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며 마음의 소란(亂騷)을 스스로 잠재우는 척하는 표면적 기술만 발전해 왔을 뿐이다.

작가의 글은 아주 많은 페이지에서 나의 생각과 닮아 있었고, 이렇게 동질감이 느껴지는 누군가와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 함께 숨 쉬고 살아가고 있음에 잠시나마 위안을 느꼈다. 나 역시 세상은 슬퍼하는 자로 인해 변화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나에게는 '순수'함이라 느껴지는 '어림'이 주는 신성한(?) 메시지까지!!!

소란(亂騷)스러운 삶에 휘청이지 말자. 때론 길을 잃을 때 소란(巢卵)과 같은 존재가 나를 품어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자. 아니면 내가 그 소란(巢卵)이 되어 살아가자(아! 근데 이건 좀 슬프다. <-이것이 내 뿌리임을 받아들이는 척하는 기술이 역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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