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0
예루살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종교에 따라 회당을, 교회를, 성당을, 모스크를 찾아가고, 그 안에서 자기의 염원과 바람을 담은 기도를 성심성의껏 올립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 종교적인 나라가 어디 있을까, 모두 신에게 무엇을 그토록 바라는 걸까,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봅니다. 이제는 신에게 끊임없이 무엇을 해달라고 보채는 기도에서 벗어나 내가 누구인지, 나는 의롭게 잘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성찰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고요. 나의 이웃, 생각의 어른을 밖에서 찾고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이웃이, 어른이 되어줄 수 있는지를 되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Quod non possint ibi verae esse virtutes, ubi non est vera religio.
퀴드 논 포신트 이비 베레 에세 비르투테스, 우비 논 에스트 베라 렐리지오.
참다운 종교가 없는 곳에 참다운 덕성이 있을 수 없다.
p.43
모든 것은 '바라봄visio'에서 시작됩니다. 개인의 고통도, 사회의 아픔과 괴로움도 그 해결을 위한 첫 단계는 '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여기가 모든 이해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국적, 성별, 나이, 종교를 비롯해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인간이기에 분명히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바라봐야 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같음'입니다.
나아가 '바라봄'이 늘 타인을 향한 것이라면 타인의 단점, 잘못된 점만 쉽게 보게 되어 결국 상대를 탓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타인을 바라보는 만큼 더 절실히 주의를 기울여 자기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조화로운 질서에 관해 연구하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진실하고 치열하게, 내면을 바라보는 눈앞에 등불을 켜서 들어야 합니다. 들추고 싶지 않은 아픔이나 불편한 양심, 혹은 잘못한 것에 대한 회환과 고통은 자기애와 만나면 이기적인 마음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또한 이런 감정들은 회피에 능해 자꾸 안으로 숨어들기 때문에 스스로 자주 불을 밝혀 바라봐야만 합니다.
p.78
종종 많은 이들이 자기가 어쩔 수 없는 것에 휘둘려 힘겨워하곤 합니다. 가정, 학교, 회사와 같은 조직 안에서나 사람들 사이에서나 내가 풀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잘 살펴 분별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새벽을 깨우는 기도 소리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할 수 없는 일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존재이고 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나의 한숨이 웃음으로 바뀌는 그날까지 길 위에서 멈춰 머무리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가기. 이것이 제가 선택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가슴 속에 무엇을 품든 우선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때론 많은 것은 한숨으로 날려 보내야 합니다. 그 한숨이 내 속에 계속 남아 자꾸 작아지는 나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면 말이지요.
여러분은 어떤 것을 한숨으로 날려 보내고 싶은가요?
날려 보낸 그 한숨 속에
여러분이 꿈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p.123
모든 옷은 그 옷에 합당한 무게를 요구합니다. 옷은 우리에게 그 무게를 지고 나갈 것을, 그 옷에 맞는 삶을 살아갈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지요. 인간의 본성은 늘 자기 문제를 합리화하고 싶어 합니다. 늘 깨어 의식하지 않으면 그 안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삶 가운데서 본인이 입은 옷이 무엇인지, 그 옷의 무게를 잘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Tomodus vocat se cautum, parcum sordidus.
티미두스 보카트 세 카우툼, 파르쿰 소르디두스.
소심한 사람은 자신을 신중하다고 부르고, 욕심쟁이는 자기를 검소하다고 칭한다.
p.136
우리나라는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다. 국가적으로 하나의 종교를 국교로 삶지 않으며, 누구도 종교 때문에 차별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적인 인식이 있습니다. 또한 내가 가진 종교적 신념이 존중받으려면 상대의 종교적 신념도 존중하는 것이 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인의 본보기, 본받을 만한 태도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공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야말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니까요.(...)
모든 자유에는책임이 따르는데 '자유'에만 큰 방점을 찍고 행동한다면 사회나 이웃과 불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을 믿고 그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나와 내가 속한 종교 공동체의 행동이 이웃에게 고통을 주거나 이웃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우리)는 종교적 가르침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을 행할 때 나와 내 공동체에는
어떤 이득이 있는가?
P.214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바라보는 것. 저는 그것이 아마도 사막에서 바라보는 별과 같지 않을까 합니다. 어떤 별을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가는 걸음의 방향은 달라질 겁니다. 그 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이때 그 길잡이는 늘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겨야 할 누군가, 사랑하는 누군가, 존경하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우리는 인생의 방향을 찾아가기도 하니까요.
현재의 우리 삶도 가만히 생각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막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럴수록 사람들이 세워놓은, 시시각각 변하는 이정표만 따라 걷는 건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사막에서 변치 않는 별자리를 보며 걷는 것처럼 우리도 변치 않는 진리, 변치 않는 빛을 보며 걸어가야 합니다. 또한 거기에서 나아가 우리 스스로 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별을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남이 보고 따라올 수 있는 별이 되면 좋지 않을까요?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저도 그리 되고자 노력할 것을 결심합니다. 밤하늘의 작지만 또렷이 반짝이는 별이 되는 것을요.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걷고 있나요?
거기서 나아가 여러분은 어떤 별이 되시겠습니까?
☆미쁨책방 이야기☆
개인적으로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지만,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서 간혹 느껴졌던 불편함을 또 는 막연히 기대했던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 깊이 있는 공감과 울림을 주는 책이었다. 비단 그 문제는 물론 소수의 종교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 모두는 넓게 보면 '같은 문제'를 가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만의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무엇을 '바라기만'하는 믿음보다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가 그 근간이 되어야 함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스스로 깨어있으며 서서히 또렷이 빛나는 밤 하늘의 별처럼 이러한 삶의 자세는 또 누군가에게는 삶의 이정표이자 희망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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