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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선의_문유석

☆북리뷰

by mibbm_soo 2022. 1. 7.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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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p.73

인간을 존엄하게 대하는 사회는 제도만으로 건설할 수 없다. 밥은 굶지 않게 최소한의 먹을 것은 국가가 지급하고 있지 않느냐, 뭘 더 바라느냐 감사할 줄 알아야지. 이런 마음이 지배하는 사회는 아무리 사회복지제도가 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급자들을 동냥하는 걸인으로 취급하는 사회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헌법상 기본권이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기본권을 주체로 보느냐, 남들의 동정을 받는 대상으로 취급하느냐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사람이 죽든 말든 정해놓은 매뉴얼과 절차가 더 중요한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는 제도는 있을지 모르되 인간을 존엄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 사람에게 차마 해를 가하지 못하고 사람의 불행을 앉아서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 이 마음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맹자의 오래된 가르침이 어쩌면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복잡한 시스템으로 가득한 21세기에 더욱 필요한 헌법적 감수성일지도 모르겠다.

 

 

p.108

인간에게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를 주지 않는 사회는 불행하고, 위험하다. 역사를 통해 그것을 깨달을 만큼 겪었으면서도 자꾸만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현실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

적당히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모순 덩어리이고 위선적인 것이 현실의 인간이다.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 높은 기준을 충족할 것을 강요하면, 하물며 개인의 사생활과 생각까지도 기준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볼 때 흐린 눈을 뜨고 볼 필요가 있다. 서로의 발가벗은 치부까지 낱낱이 보아야 할까. 굳이?

여름날의 폭염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집단적 분노가 뜨거운 것이 우리 사회다. 권리를 주장하면 밥그릇 지키라고 욕하고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돌팔매질을 당한다. 완벽하게 고결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는 한 위선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타인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도덕적 염결성을 요구하기 보다는, 각자 최소한의 규칙은 엄수하기, 각자의 밥그릇을 존중하며 타협하기, 건전한 무관심, 그리고 최소한 사악해지지는 말자는 자기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사회에서 비로소 개개인 최후의 성역, 생각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

 

 

p.127

언제부터인가 나는 우리 시대가 '인간 공해'의 시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존재다. 그래서 더욱, 너무 많은 인간들에게 상시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어두운 면이 있다. 어리석음, 위선, 뻔뻔한 이기심, 잔혹함, 비겁함. 예전에는 대면하는 관계에서만 직접 그런 면들을 감당하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면식도 없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어두운 면들이 쉽사리 내 눈에 들어온다. 인간의 밑바닥이 궁금하면 자기 자신의 솔직한 바닥부터 들여다보면 될 일인데 왜 불특정 다수의 밑바닥을 굳이 접하며 살아야 할까? '밑바닥 페티시즘'인가? 이제는 '알권리'보다 '모를 자유'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인간 다이어트'가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탄수화물 중독처럼 인간 중독도 중독이다. 전통적인 자유권적 기본권은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의 근대적 인간관을 전제로 성립되었다.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 역시 이런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의 자유를 국가권력이 억압하는 관계를 기본으로 상정하고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는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다른 측면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생겼다. 비유하자면 마약중독자와 마약상의 관계라는 측면이다.(...)

알고리즘은 그저 이용자들이 무얼 먼저 클릭하고 더 오래 들여다보는지에 따라 기계적으로 우선순위를 바꿀 뿐인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이성적이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인 이용자들이 자기 선택에 따라 서비스를 소비했을 뿐이고, 플랫폼은 이용자들이 선호하는 상품을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했을 뿐이다. 하지만 '중독'의 관점에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약중독자들은 결코 이성적으로 자기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다. 중독은 선택의 자유를 앗아간다. 의존하게 만들 뿐이다. 그걸 뻔히 아는 마약상들은 그저 중독자들에게 '물건'을 내밀 뿐이다. 너의 선택일 뿐이라면서.(...)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언론기관이기보다는 개별 국가권력 이상의 존재로 진화하고 있기에,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공해를 대량으로 뿜어내는 거대 굴뚝 기업들의 세상에는 소박한 무리생활을 하던 원시인의 본능을 가진 우리, 슬픈 인간 중독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개인의 선택과 책임만으로 돌리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p.173

위기는 자유를 사치로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자유는 위기의 시대일수록 소중히 지켜야 그것을 영영 잃어버리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목적이 정당하고, 방법 면에서 매우 효과적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조치는 필요 최소한이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과잉금지 원칙은 개인들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2017년 12월 영국 카디프시 시민 에드브리지스는 쇼핑을 하러 시내에 나갔다가 경찰의 안면인식 감시 카메라에 찍혔다. 영국 사우스웨일스와 런던 등에서는 경찰 밴에 안면인식 카메라를 설치하고 행인들을 무작위로 촬영해 이들의 생체인식 데이터를 범죄자 정보와 대조하는 조치를 2015년부터 시범 도입했다. 브리지스는 경찰이 동의 없이 자신을 촬영하고 정보화해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경찰의 손을 들어줬다. 안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2020년 8월, 항소법원은 경찰의 안면인식 기술 사용이 인권과 개인정보보호법에 위반된다면서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기술 사용에 있어 명백한 지침이 없음에도 개별 경찰에게 과도하게 재량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과잉금지원칙은 이렇게 작용한다. 공권력이 일견 합당한 목적을 명분으로 너무 성급하게 한 방향으로 달려갈 때, 그 과정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오바'하지 말라고.

 

 

p.248

[에필로그 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

(...)

 

칼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나 작두로 악인의 목을 썽둥 자르는 포청천의 이미지 때문인지 법이란 옳고 그름을 명쾌하게 가리는 흑백논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법은 오히려 인간사회 속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가치들의 충돌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노력의 산물이다. 자유의 보장과 제한에 관한 수많은 법리들이 발전해온 과정, 형식적 평등에서 실질적 평등으로 발전해온 과정,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웠던 근대적 헌법이 수정자본주의 시대에 많는 복지국가 헌법으로 발전해온 과정이 다 그렇다. 법은 종교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법은 타협의 기술이다.

유감스럽게도 언젠가부터인지 타협은 희귀한 일이 되었다. 정치의 장에서도, 사회 공론의 장에서도 모든 것을 선과 악, 아군과 적군, 정의와 불의로 나누는 전쟁의 언어, 혐오의 언어가 가득하다. 이 전쟁에 동원되는 논리는 종교에 가깝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각자의 선명한 정의와 정의가 부딪혀 파열음을 낸다. 모두가 각자의 깃발을 들고 도덕적 십자군운동을 벌이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신중함, 상대주의, 절차적 정당성을 내용으로 하는 '법치주의적 사고방식'이 설 자리는 희귀하다. '중립충'이라는 증오 섞인 화살이나 날아올 뿐이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 중 '과잉금지의 원칙'이 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때 따라야 할 원칙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이 원칙은 과연 국가기관만 명심하면 되는 원칙일까?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극도로 발달한 이른바 '초연결 사회'에서 대중이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당한 분노에서 출발한 여론이라 하더라도 소셜미디어를 통한 끊임없는 분노의 재생산 속에서 자칫 멈추지 못하고 극단적인 증오로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다. 정당한 분노라하더라도 반드시 '끝장'까지 봐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경우에 반드시 표적이 된 상대의 밥줄을 끊고 사회적으로 매장해야 하는 걸까?

정치적 대립은 더 극단적이다. 내가 지지하는 세력은 정의고, 저들은 악마다. 악마와는 공존할 수 없기에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저들을 무력화시키고,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밟아버려야 한다. '법치주의'는 단순히 제도가 아니라 사고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과잉금지의 원칙' 역시 다르지 않다. '분노조절장애'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과잉금지가 시민사회의 상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과잉금지의 원칙은 결국 끝장을 보려 하지 말고 멈출 줄 알자는 사고방식이다. 끝장을 보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멈추는 것은 비겁한 타협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보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인간사회에 정말로 '끝장'이라는게 있다고 생각하는지. 청산하고, 척결하고, 쓸어버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있는지.

(...)

인간 세상이란 나의 옮음에 동조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될 수 없다. 가치관도 취향도 몸도 마음도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보면 너도나도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부딪히며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생태계인 것이다. 과잉금지의 원칙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 원칙으로 발전했지만, 시민사회 내부에서도 공존을 위한 지혜로, 성숙한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헌법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다.

 

 

 

☆미쁨책방 이야기☆

「개인주의자 선언」에 이어 읽는 문유석 판사님의 책이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느꼈던 감동과 깊은 여운이 이 책에서도 그대로 울림이 되어 전해진다.

에필로그를 통해 기록된 판사님의 글 한 자 한 자 모두가 마음에 담고 싶은 이야기이기에 감히 따로 생각을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여러번 읽어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플랫폼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 꼭 필요한 귀중한 말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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