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6
더 이상 상대를 옭아매는 연애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과연 나는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아오이를 일상에서 쫓아 내지 못하는 한, 메미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들고양이 같은 그녀에게 화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상대를 옭아매고 싶지 않으니까, 하고 얼버무린다.
결국 아오이가 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상,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난 아직 아오이를 가슴속에서 내몰아 버릴 정도의 연애를 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p.98
ㅡ 약속할 수 있니?
ㅡ 무슨?
ㅡ 내 서른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만나기로, 어때?
ㅡ 피렌체의 두오모? 왜 그런 곳에서? 밀라노의 두오모는 안 되니?
ㅡ 밀라노 쪽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오모이고, 피렌체 쪽은 세계에서 가장 멋진 두오모라고, 페데리카가 말했어.
ㅡ 또 페레리카로구나.
ㅡ 땀을 흘리며 몇백 계단을 필사적으로 오르면, 거기에 기다리고 있을 피렌체의 아름다운 중세 거리 풍경에는 연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는 미덕이 있다고 했어.
ㅡ 그렇다고 딱히 거기서 만날 약속은 안 해도 되잖아. 서른 살 네 생일 때, 우리 같이 가도록 해.
ㅡ 응, 우리가 헤어지지 않는다면.
ㅡ 그런 소리 하지도 마. 꼭 우리가 헤어질 것처럼 말하네. 네가 무슨 예언자니?
ㅡ 모르잖니, 미래 일은. 그러니까, 오늘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약속해 줘. 오늘의 이 마음을 언제까지고 간직하고 싶으니까 약속하는 거야. 내 서른 살 생일날, 쿠폴라에서 기다려 주는 거야.
ㅡ 네가 먼저 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ㅡ 아니, 영원히 날 마음에 간직한다면 자기가 먼저 가서 기다려 줘야 해.
ㅡ 서른 살. 앞으로 10년 후의 일인데······.
p.121
그 그림은 선생 자신이 찢은 거야······.
안젤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 소리는 맹렬한 기세로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면서 머리를 파열시키려 했다.
(...)
"···선생은 널 질투한 거야."
"왜?"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선생은 자신보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너에게 질투를 느낀 거야. 그건 엄연한 사실이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가 그 말과 함께 귀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을 몰랐다.
che vita e, che vita e······.
p.140
"쥰세이는 어떻게 생각해? 일도 하지 않고 이렇게 할아버지 도움만 받으며 살아갈 생각이야?"
아냐! 하고 강력하게 부정하면서도 더 이상 반론할 말이 없었다.
"일 안해?"
"해야지."
"해 줘, 나를 위해."
"메미를 위해?"
"웅, 우리의 미래를 위해."
눈을 반짝이며 그렇게 말하는 메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미래를 위해? 마음속으로 나는 자문했다. 미래를 위해 살아 본 경험 따위는 없었다. 메미가 바라는 미래를 함께 엿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공포였다. 이제 어떤 행동으로든 이런 교착 상태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은 모두 미래를 향해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p.142
내 곁에는 메미가 있고, 난 아직 백수이고, 게다가 나는 과거의 사슬에 얽매어 아직도 아오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번잡하다. 마음이라는 부분이 육체의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는 탓도 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지만, 어깨나 발목의 아픔과는 달리 어떻게 처리할 길이 없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나는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아픔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흘러가는 시간이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과거를 잊게 해주리라 기원하면서······.
마음의 오랜 상처가 점점 더 아파 오는 이유는 그 날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약속한 날까지 이제 1년 남았다.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마치 꿈속에서 주고받은 듯한 근거도 없는 약속. 그러나 치유할 길 없는 내 마음은 분명히 그 날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메미의 요구로 그녀를 품에 안아도, 마음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남자라는 동물이란 이렇게 허망하다.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안을 수도 있기에, 그것안 반쯤은 동정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메미를 모욕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관계를 마칠 때마다 후회하지만, 오늘이라는 날을 어떻게든 지내고 보자는 게으른 자포자기적인 성격 탓에 나는 일순의 쾌락에 몸을 맡겨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사무적인 행위라는 것을 메미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메미는 집요하게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나를 갈구하는 것이다. 그녀로서는 나에게 안기는 것 외에는 나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서로를 안는 것이 두 사람을 하나로 이어 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 이기라도 한 것처럼.
p.158
다카시가 내게 고한 그 사실이 과거의 모든 수수께끼와 의구심들을 깨끗이 날려 버렸다.
"유산?"
"응, 어차피 구할 수 없었대."
다카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가 있었어."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의 기분으로······.
"아오이 앞에 나타난 네 아버지가 아기를 지우라고 강요한 거지."
"어떻게 그런 일이?"
다카시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없을 때 우연히 아버지가 내 방을 찾아왔다. 거기에는 방금 산부인과에서 돌아온 아오이가 있었다. 당시의 아버지 애인, 즉 나의 새엄마가 테이블 위해 놓인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무자비한 언어 폭력을 가한 후, 쥰세이에게 어울리는 여자를 며느리로 삼을 생각이니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남몰래 동거나 하는 그런 여자와 결혼시킬 수 없다, 부모 몰래 아기를 만들 애가 아니다, 어떻게 아들을 꼬셨느냐, 원하는 게 뭐냐, 유산이냐, 유산이라면 너나 너의 뱃속의 아이에게는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라고 했던 것이다.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다. 세이지 할아버지가 소지한 회화 컬렉션을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노려 왔다. 그 새어머니와 한통속이 되어 할아버지의 유산을 혼자서 차지하려는 것이다. 나에게조차 한 푼도 건네줄 생각이 없다. 내가 아이를 낳으면 귀찮아질 것이다. 새어머니는 아버지 이상으로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오이에게 사죄하는 편지를 쓰면서,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과거를 이겨 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혹한 시간 속에서 그녀는 나를 저주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시간을 돌려서, 그녀 앞에 서서 머리를 숙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오랜 세월의 끝자락을 우리 두 사람은 헤엄쳐 나가고 있다. 이제 와서 아무 소용이 없는 사죄였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인생을 다시는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탈리아로 가기를 포기하고 편지라도 쓰고자 했던 것이다. 처참한 피로감에 젖은 채, 나 자신을 저주하면서 조용히 편지를 써 내려갔다.
그것을 우체통에 넣는 순간, 나는 크게 한숨을 몰아쉬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메마를 때까지 울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 피보다 더 붉은 우체통에 몸을 기댄 채, 내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는가, 하로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들을 애달파했다.
진실을 알고부터 나는 더 이상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았다. 아오이의 서른 살 생일날에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자는 어처구니없는 약속은 꺼져 가는 가느다란 촛불보다 더 희미한 빛이었다.
p.165
그때, 아오이는 혼자 병원에 가서 혼자 처리했다. 나에게는 비밀로 하고 모든 것을 혼자서 했다. 왜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 고통스러울 때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늘 혼자서 결정하는 강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을 부러워했고, 동경했고 또 저주했다.
"지금도 아오이를 잊지 못하는 거지?"
매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떨리고 있었다. 그래, 잊을 수 없어,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린 다신 만날 수 없어. 다시는 사랑을 나눌 수 없는 거야. 그럼 됐잖아."
내 말에 내가 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후회의 감정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쥰세이의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아오이가 있는 거잖아."
"있다고 내가 뭘 할 수 있겠니."
"있긴 있는 거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아무 대꾸도 앉자 메미의 어투는 점점 감정적이 되어 갔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몰라. 잔인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말해 두겠어.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도 나를 곁에 두고 마치 대용품처럼 여겼어."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메미의 감정의 봇물이 터지고 말았다. 메미는 흐느껴 울었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공기를 울린다. 나는 메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나야,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절대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메미, 난 그런 생각으로 널 만나는 게 아냐."
그러나 메미의 감정은 이미 아무도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튀틀려 있었다. 목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져 갔다. 메미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내 가슴에 닿아 왔다.
"동정받고 싶지 않아. 여자에게 동정만큼 잔혹한 건 없단 말이야."
p.178
미국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까지 조국을 모르고 자란 나에게, 같은 얼굴의 동년배들은 한결같이 마음의 회로가 다른 이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사고방식이 전혀 달라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들뿐이었다.
여기는 미국이 아냐, 누군가는 내 삶의 방식을 비판했다.
대학 생활에서 겨우 마음을 쉴 수 있는 광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것이 사랑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온 힘을 기울여 그녀를 사랑하고, 그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가 사랑이 도를 넘어 버렸다.
서둘지 말라고, 늘 냉정한 그 사람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영원하지 못한 찰나의 꿈과도 같은 여름 햇살은 왜 이다지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순진무구한가. 여름이 올 때마다, 그 밝은 햇살 아래서 갈 곳을 몰라, 어두운 그늘을 가려 걸어가는 나였다.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다.
p.180
ㅡ 왜 헤어져야 하는 거야?
ㅡ 그녀는 현관 입구에 우두커니 선 채 떨리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냉정을 잃은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내 가슴에 스스로 못질을 하면서 부서져 갔다. 너무도 사랑했기에, 돌이킬 수 없었다.
ㅡ 왜냐고? 널 어떻게 믿을 수 있겠니.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변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ㅡ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애? 웃기지 마. 네가 한 짓을 좀 생각해 봐, 그것도 모르겠어. 나가 줘.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흥분한 나와는 달리, 그녀는 가만히 내 발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도 들지 않고, 소리도 없이, 현관 바깥으로 사라졌다.
광장을 잃어버린 후, 인생의 종언을 기다리는 만년의 노인처럼 나는 더 이상 산책도 하지 않고, 다시금 고독의 방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살, 흘러가는 구름만 멍하니 바라보는 인간이 되었다.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p.217
"선생의 죽음이 나를 이 곳으로 불러들인 건 사실이지만, 이 곳에 온 것은 아마도 아오이와의 약속 때문일거야.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한편으로, 나는 아오이와 약속한 날이 가까워졌다는 것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선생의 죽음과 아오이와의 약속은 전혀 별개의 일이지만, 내 속에서는 이상하게 그 두 가지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어. 선생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당하면서, 난 지금 살아간다는 것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
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오이가 약속을 기억하리라고는 믿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메미와 헤어지면서까지 아오이와의 약속에 모든 것을 걸었어. 메미는 정말로 나를 사랑해 주었어. 나도 거기에 응하고 싶었어."
"응한다는 말, 그건 메미를 모독하는 게 아닐까. 그런 말은 하지 말도록 해."
인수의 목소리는 너무도 부드러웠다.
"미안해.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메미의 천진무구한 애정은 다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던져 주었어. 나도 메미를 좋아해. 그냥 겉치레로 하는 말은 아냐. 그렇지만 아오이를 잊을 수 없어. 잊을 수 있다고 믿었기에 메미와 사귈 수 있었던 거야. 그렇지만 좋아했고, 앞으로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시간이 흐르면서, 내 속의 아오이가 점점 더 커져 가는 것을 느꼈지.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난 죽을 때까지 아오이를 잊을 수 없을거야."
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 메미를 고려하는 그녀의 상냥한 마음이 전해져 왔다. 미안해, 하고 말을 마치고는 후회하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어서 그만 모든 것을 이야기했지만, 예전의 룸메이트가 지금 도쿄 하늘 아래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가는지를 생각한다면, 인수가 동정이나 동의를 표할 리 없었던 것이다.
p.245
두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안고 있는 것은 8년 전의 아오이였다. 아오이도 필시 8년 전의 나를 안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과거와 잔 것이다.
1초라도 빨리, 현재를 과거로 물들이고 싶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거대한 계곡을 메우고 싶었다. 임시라도 다리 하나 높고 싶었다. 그러나 계곡은 생각보다 깊고 험했다.
과거는 고통이나 증오심조차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아오이를 안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나의 눈물은 아오이의 어깨를 적셨다. 그러나 그녀도 울었는지는 모른다.
p.250
나 또한 지난 8년의 세월을 담담하게 읊었지만, 그것은 자존심 센 내 성격이 보여 준 유일한 연기이기도 하였다.
행복하구나, 그럴거야, 아오이는 행복했던 거야······.
미국인 애인이 있고, 그녀를 기다려 주는 거리가 있고, 직장이 있고, 육친과도 같은 페데리카가 있고, 상냥한 친구들이 있다. 그것들로부터 아오이를 빼앗아 올 자신이 없었다. 그런 열정은 올바르지 못하다.
나는 메미와의 나날들을 이야기했다. 다소 과장하여. 대항의식이 그렇게 나를 만들었다. 마음속으로 메미에게 사죄하면서 나는 끝도 없이 떠들어댔다.
"그렇지만 난 하루도 만족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 약속만 기억하며 살아온 거야."
아오이는 나를 바라보며,
"쥰세이."
하고 불렀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내 볼을 감쌌다.
"응?"
"쥰세이."
쥰세이, 쥰세이, 쥰세이, 쥰세이······. 아오이의 목소리는 8년 전 그대로 높고 가늘고 약하고 달콤했다.
p.254
과거도 미래도 현재를 이길 수 없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일순간이며, 그것은 열정이 부딪혀 일으키는 스파크 그 자체다.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현재는 점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어 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내 가슴을 때렸다. 나는 과거를 되살리지 않고,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현재를 울려퍼지게 해야 한다.
그녀는 이 곳에 왔다. 10년 전의 사소한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약속을 기억하지 않았던가. 행복한 인생 속에서도 그녀는 과거를 뚜렷이 기억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오이는 이 거리로 왔다. 그래서 우리는 재회했다.
두려움과 망설임 때문에 모든 것을 향해 등을 돌려 버리면, 새로운 기회는 싹이 잘려 다시는 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못할 것이다. 후회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오이"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본다. 무엇보다 소중한 현재. 산타 마리아 노베라 역을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노력도 해 보지 않고, 그녀를 그녀의 현재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 8년을 다시 얼어붙게 해서는 안 된다.
역이 가까워지면서 어느새 나는 달리고 있었다. 과거로 돌릴 수는 없다고 외치면서.
p.262
역자 후기
(...)
밤하늘의 별빛은 파랗다. 빛 자체가 파랗기 때문에 별이 파란 것은 아니다. 어둠 속에 빛이 있기에 파랗게 보일 따름이다. 그래서 파랑은 처음의, 시작의 색이다. 어둠이 표현하는 모든 뉘앙스와 이미지를 뒤로하고 이제 뭔가가 시작되는 그 순간에 파랑이 일어난다. 시작의 순간에는 항상 설렘과 두려움, 우울이 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블루를 멜랑콜리아의 색으로 치부하기도 하는 것이다.
(...)
연애란 늘 이런 파랑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연애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이다. 연애는 설렘과 회환과 애들픔과 우울과 절망과 고통을 준다. 그것은 과거의 나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남녀의 사랑이다. 연애하다가 죽는 사람은 제대로 길을 간 것이다. 그럴 각오로 하는 게 연애니까. 안 죽고 다시 태어나면 다행, 죽으면 당연, 그렇게 연애를 하지 않으면 그런 사랑 정말 별 볼일 없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늘 청(靑-아오이)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것이 바탕색이다. 쥰세이는 서른 살에 그 청을 찾았다. 새로운 세기의 시작에 알맞은 행복한 연애 이야기다.
☆미쁨 책방 이야기
하나의 이야기를 남자, 그리고 여자의 입장에서 쓴 두 권의 책이 존재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기대감이 증폭되고, 에쿠니 가오리의 이야기를 먼저 읽고 난 후, 츠지 히토나리는 과연 이 이야기를 어떤 시각으로 풀어내었을지 너무 궁금했다. 두 소설 모두 단숨에 읽힐 정도로 몰입감이 상당했고, 여성과 남성의 심리묘사가 섬세하면서도 깊은 공감을 자아내게 했다.
사랑은 복잡 미묘한 감정의 결정체다. 자존심, 슬픔, 원망, 회환, 그리움, 사랑, 증오, 배려, 포용, 인내 등 많은 휘몰아치는 감정을 경험하게 하며, 그것을 온전히 겪어내는 과정은 한 사람의 인격을 성숙하게도 때론 미성숙한 존재로 남게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랑을 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느끼며, 또 실현해나가는가' 가 아닐까.
최선을 다한 사람은 후회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설령, 이별을 마주하고 내 뜻과 다른 상처로 때론 사랑 앞에 무릎을 꿇는 날이 온대도, 그 과정을 통해 얻은 사람과 삶에 대한 성찰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더 좋은(?) 사랑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밖에 없음을 믿는다.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해낼 때 우리는 더 큰 '사랑'으로 '현재'를 더욱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북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보기] 냉정과 열정사이_에쿠니 가오리 (0) | 2025.03.12 |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_에릭 와이너 (0) | 2025.02.22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_요한볼프강폰괴테 (0) | 2025.01.28 |
마음의 지혜_김경일 (0) | 2025.01.04 |
말의 진심_최정우 (0) | 2024.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