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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다시 보기] 냉정과 열정사이_에쿠니 가오리

by mibbm_soo 2025. 3. 12.

01

p.148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이 도시에서의 온화한 생활, 그런데 나한테는 모든 것이 소설 속의 얘기처럼 여겨진다. 용감한 우등생이었던 다니엘라가 ㅡ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함께 메렌다를 우물거렸던 다니엘라가 ㅡ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자 이번에는 사랑스런 딸까지 낳았다는 것 모두가, 왠지 수조 속에서 일어난 일들 같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저 멀리 떨어진 장소.

벌써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면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세계는 ㅡ 친구조차 ㅡ 언제나 조금은 먼 장소다. 나 자신과 외부를 차단하는 얇은 막 같은 것.

마빈과 나 사이에도 그런 것이 있다.

p.152

쥰세이는 피식 웃었다. 스무 살이었다. 우리는 대학의 뒤뜰에 있었고, 밀라노도, 피렌체도, 페데리카도, 가공의 존재인 듯 멀었다.

ㅡ 약속해 줄래?

그 때 나는, 평소에 없는 용기를 그러모아 말했다. 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하는 사랑의 고백이었으므로.

피렌체의 두오모에는 꼭 이 사람과 같이 오르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쥰세이는, 너무도 쥰세이답게 주저없이 약속해 주었다.

좋아. 10년 뒤 5월이라. 그 때는 21세기네.

쥰세이의 웃는 얼굴은 언제나 들판처럼 편안했다. 라 미야 캄파냐(나의 들판). 장난삼아 그렇게 불렀다.

p.176

(...)

아오이, 너한테 사과해야 할 일이 있어. 그 때문에 이런 편지를 쓰고 있는 거야.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 방에 아버지가 찾아왔었다는 것도, 아버지가 너한테 했다는 끔찍한 말도.

정말 미안해.

젊음과 부족함 탓으로 돌릴 생각은 없지만,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나. 계류 유산이라면서. 결국 아이는 살 수 없었다는 것, 오늘에서야 알았어. 네가 임신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내 감정대로 너를 비난하고 몰아세웠지. 부끄럽다.

장황하게 쓰고 말았군. 일본을 떠나, 태어나고 자란 밀라노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을 아오이에게, 과거의 불쾌한 일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

ㅡ 여전히 제멋대로군.

옛날처럼,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 한숨을 쉬겠지. 그러고는 소리없이 미소도 지을까. 용서해 달라는 말은 못하겠어. 사과하고 싶지만. 다만, 왜 모든 것을 얘기해 주지 않았는지, 그 한가지만은 섭섭하군.

잘 있어. 나이스 가이에게도 안부 전해 주고.

(...)

- 준세이 -

p.178

봉인한 기억. 뚜껑을 닫아 종이로 싸고, 끈으로 묶어 멀리로 밀쳐 내버렸다고 여긴 기억.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거리도, 대학 생활의 흔해빠진 즐거움도, 준셰이와의 일도 모두모두.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너무 무서웠다. 어렸던 것은 쥰세이 뿐만이 아니었다,

그 날 ㅡ 비가 내렸다. 싸늘한, 도쿄의 겨울에 내리는 비 ㅡ , 쥰세이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파트로 찾아왔다. 그 곁에 누군지 모를 여자가 있었지만 그녀는 자기를 밝히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ㅡ 누구지?

아버지라는 사람은 나를 보더니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 차를 끓이려고 하자, 그럴 필요없다고 퉁명하게 내뱉었다.

병원에서 받은 서류 ㅡ 초음파 사진과 주의 사항이 인쇄된 종이를 발견한 것은 여자 쪽이었다.

ㅡ 이것 좀 봐요.

놀란 듯 쥰세이의 아버지를 부르고, 그 목소리는 과연 놀란 듯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목소리를,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듣는다.

중절에 관해서, 하지만 쥰세이는 자책할 필요 없다. 수술은 나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무서웠다. 나 자신도 임신을 기뻐하지 못하면서, 쥰세이가 기뻐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무서웠다. 수술해.

쥰세이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그런 짓을 했지. 차라리 그런 말을 듣는 편이 백만 배나 나았다.

벌써 오랜 옛날 일이다.

p.198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부엌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벌써 몇 년 전, 쥰세이를 잃었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ㅡ 왜냐구?

쥰세이는 놀란 듯했다.

ㅡ 너란 인간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쥰세이는 점점 더 상처를 받는 듯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 왔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상처를 입으면 공격적이 되는 것은 남자들의 본성일까.

ㅡ 어처구니가 없군.

토하듯 말했다. 쥰세이는 그 때 청회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별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

ㅡ 나가 줘.

그렇게 말했을 때, 쥰세이는 이미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겨울이고, 하네기 공원에는 서리가 내려 있었다.

나가라고 하지 마. 그 때나 지금이나, 그 말은 고집스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p.202

마빈은 그 다음 날도 찾아왔다. 상황은 어제와 똑같았고, 마빈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ㅡ 정말 고집이 세군.

마빈이 말하고 쓸쓸하게 웃었다.

ㅡ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 집에서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는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 돌아갈 장소. 줄곧 그런 장소를 찾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지만, 한 번도 없었다.

쥰세이가 보고 싶었다.

기묘한 열정으로,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만났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다만 쥰세이와 얘기하고 싶었다. 내 말이 통하는 사람은 쥰세이밖에 없다.

p.210

"아오이"

페데리카의 방은 기묘하다. 방 전체가 페데리카 같다.

"네?"

담배를 낀 손가락에, 오늘도 남편한테 선물 받은 묘안석 반지를 끼고 있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페데리카는 내 얼굴도 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거의 혼자 중얼거리듯.

p.241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선 채로, 나는 쥰세이를 보았다. 자그마한 몸에, 꼿꼿한 자세,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어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리운 쥰세이.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지 않았다. 믿어도 좋을지, 그것을 망설였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쥰세이가 그 쥰세이라고, 약속한 대로 내 생일에 이 곳에 와 주었다고, 믿어도 좋은 것인지.

믿어도 좋은가, 하지만 결심하기에 앞서 나는 걷고 있었다.

"쥰세이."

만나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고 고백하듯,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그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돌아본 쥰세이의, 기억 속보다 야윈 볼.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피렌체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두오모의 꼭대기에서. 부드러운 저녁 햇살 속에서.

p.256

ㅡ 네 이야기를 해 봐.

내 머리에 입맞춤하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쥰세이가 말했다.

ㅡ 아오이가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나는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 토했다. 몸을 비틀어 쥰세이를 보았다. 슬픈 얼굴을. 그리고 앞을 쳐다보고 얘기했다. 지나와 파올라의 보석가게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 거기서 마빈을 만났다는 것, 함께 살기 시작한 것, 다니엘라가 결혼하여 여자아이를 낳았다는 것, 페데리카는 잘 지내고 있고, 가끔 식사에 초대해 준다는 것.

마빈과 헤어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왜 였을까?

행복한 거지?

나는 앞을 향한 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쥰세이는 내 머린칼에 또 입맞춤을 하였다.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그리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고화 복원사가 되려고 피렌체에 왔다는 것, 선생님을 만났다는 것, 선생님의 그림 모델이 되었던 것. 쥰세이는 그림을 복원하는 일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얘기해 주었다. 복원사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이킬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직업'이란 것도.

그리고, 메미란 여자에 대해서도. '새끼 고양이'처럼 분방하고 쟤기발랄하고, 한결같고 정직한 여자라고.

소중한 그림을 누군가가 칼로 그은 사건이 있었다는 것, 일본으로 귀국하자 메미가 뒤쫓아왔다는 것, 할아버지가 입원한 것,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피렌체에 다시 돌아온 것.

p.258

하지만 알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내가 끼어들 수 없는 장소에서, 이 사람은 이미 새로운 인생을 쌓아 가고 있다.

ㅡ 쥰세이.

쥰세이. 쥰세이. 쥰세이. 나는 몇 번이나 중얼거리면서, 쥰세이의 두 손을 잡고 일으켰다.

(...)

ㅡ 우리 맛있는 점심 먹자. 오후 기차로 돌아갈 테니까.

쥰세이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붙잡아 주지 않는 쥰세이의 올바름과 성실함을 사랑한 것이었다.

쥰세이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풀고 미소 짓더니,

ㅡ 알겠어.

라고 말했다.

ㅡ 걱정 마, 막지 않을 테니까.

내 얼굴이 뒤틀린 것을, 쥰세이가 눈치재지 못하기를 바랐다.

ㅡ 아오이.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라고 쥰세이가 말했다. 사랑한다, 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울림으로.

ㅡ 나도.

샤워를 하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화창한 한낮의, 피렌체 거리로.

역자후기

p.263

(...)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목욕물은 따스하고, 어깨를 주물러주는 애인의 손길은 듬직하고 푸근한데, 그녀의 목덜미로 서늘한 고독과 악몽의 그림자가 어린다. 온 젊음과 존재를 바쳐 사랑했던,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의 봉인된 옛 추억은 그녀를 어떤 가슴에서도 안식할 수 없는 어둠에 가두고 있다,

그 어두운 추억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그녀는 그녀 자신일 수 없다.

현실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다.

그녀의 예쁘장하게 포장된 일상, 그러나 허망하고 위태롭고 껍질 같은.

마침내 그 위태로움에 균열이 생기고.

10년 전,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떠나는 짧은 여행.

또는 현재의 허위와 결별하려는 여행.

과거가 머물러 있는 고도(古都) 피렌체,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오모'에서 거의 그녀 자신의 분신인 아가타 쥰세이와의 재회.

헤어짐의 이유였던 오해가 풀리고 사랑도 재확인하지만, 그녀 자신으로 돌아온 그녀는, 빛을 되찾은 그녀는, 사람의 있을 곳이란 오직 자기 가슴뿐이라는 깨달음을 안고 새로운 내일을 예감하며 발길을 돌린다. 이런 사랑의 반쪽 이야기.

어떤 사랑에든 희망과 절망이 있고, 애정과 증오가 있고, 오해와 이해가 있고, 포용과 배척이 있듯, 그 모든 양극이 한 데 어우러져야 온전한 사랑이듯, 아가타 쥰세이와 아오이의 이야기가 한데 얽혀 하나의 사랑 이야기가 완성되는 독특한 소설.

☆ 미쁨책방 이야기

오래전 읽은 책인데, 명확한 스토리가 기억나지 않아 다시 잡은 책.

두 남녀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여성의 시각(아오이)에서 쓴 이 책과, 남성의 시각(쥰세이)에서 쓴 책이 있다. 쥰세이의 시각에서 쓴 책은 파란색 표지인데 마찬가지로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책을 살짝 들여다보니, 여기저기 스티커로 표식을 해둔 곳이 많다. 아마도, 의미심장하게 읽은 것이 분명하다.

쥰세이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10년이란 세월은 얼마나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가.

아오이가 10년만에 쥰세이를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감정. 믿어도 좋을지 망설였다는 표현. 그 말이 참 아프다.

아오이와 쥰세이는 아마 서로의 현실에 이제는 자신이 들어갈 공간이 없을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감정을 숨겼거나(그것이 비록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을지라도), 혹은 아름답기도 아프기도 한 젊은 날의 추억이 자칫 훼손될 수 있음을 염려했거나, 혹은 현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면서까지 손 내밀 용기가 없었거나 등등의 여러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간직하고 그저 서로의 가슴에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되길 선택한 것은 아닐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그래서 때론 용감하면서도 비겁하기도 한 그런 존재는 아닐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