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2
1771년 5월 4일
(...)
나 자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고 있다니, 인간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인지! 친구여, 약속할께. 난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어. 운명이 툭툭 던지는 소소한 불행을 곱씹을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지금까지는 그랬지만 말이야. 지나간 건 그냥 지난 일로 묻어 두겠어. 친구여, 자네 말이 백번 맞아.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해 이미 지나가 버린, 불행했던 일을 끄집어내지 않고, 그렇고 그런 현재를 그냥 버틴다면ㅡ인간이 왜 그 모양으로 만들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ㅡ인간은 훨씬 덜 고통스러울 거야.
p.20
5월 17일
(...)
이곳 사람들은 어떠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어디나 사람은 다 같다고 말이야! 사람들이란 대부분 어디 있건 다 비슷해. 그저 먹고살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 붓다 조금이라도 짬이 생기면 불안해하는 거야. 그러면서 그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시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 이런 게 인간의 운명인 거야!
하지만 서민들은 참 착해! 때때로 내 자신을 잊고 그들과 함께 아직도 인간에게 주어진 기쁨을 나눌 때, 말하자면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아 허심탄히하게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적당한 때에 마차를 타고 산책을 한다든지, 무도회를 연다든지, 또 그 비슷한 일들을 할 때면, 난 마음이 흐뭇해지지. 다만 아직도 내 안에 광장히 많은 다른 힘들이 깃들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힘들이 하나도 쓰이지 않은 채 썩어 간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조심스레 숨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만 생각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 그런 일들이 내 가슴을 꽉 조여 와. 그러나 어쩌겠나, 뭇사람들한테 오해를 받는 건 인간의 운명이지.
p.26
5월 22일
(...)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겸허한 마음으로 인식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야. 유복한 시민은 자기 집 작은 정원을 낙원으로 꾸밀 줄 알고, 불행한 사람이라도 무거운 짐을 지고 헐떡거리면서 쉬지 않고 끈기 있게 자기 길을 가는 법이야. 사람들은 모두 햇빛을 일 분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해. 그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그런 사람들은 말없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내. 그리고 어떤 제약이 가해져도 가슴속에는 늘 자유라는 달콤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어. 언제라도 원하기만 하면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그런 자유의 느낌 말이야.
p.32
5월 27일
(...)
친구여, 내 마음을 추스릴 수 없을 때 난 어떤 사람들을 보지. 그러면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게 누그러지거든. 어떤 사람들이냐면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 비좁은 삶의 테두리 안에서도 느긋하고, 행복한 마음을 간직한 채 힘든 하루하루를 꿋꿋이 견뎌 내고, 나뭇잎이 떨어지면 겨울이 오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겨울이 온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안하지.
p.97
8월 12일
(...)
알베르트에게 그런 이야기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지. 난 얼마 전에 물에 빠져 죽은 채 발견된 어떤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어.
(...)
마침내 그 아가씨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뭔지 모를 감정에 사로잡혀 그만 그 남자에게 모든 희망을 걸게 되었지요. 자기가 속한 세계도 깡그리 잊었어요. 그 남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안 들렸지요. 이 세상에 딱 한 사람, 오메불망 그 남자만 그리워한 거예요. 그 한 사람만을요.
허영심 끝에 오는 공허한 즐거움을 아직 몰랐던 아가씨는 타락하지는 않았지요. 아가씨는 그의 아내가 무척이나 되고 싶었어요. 아가씨는 그와 결혼해서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몹시도 그러고 싶었지요.
그가 몇 번이나 약속한 터라 아가씨는 자기 희망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죠.
(...)
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의 애인이 그녀를 떠나 버린 겁니다. 몸이 돌처럼 굳어 버린 그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심연 앞에 섰지요. 주위는 온통 캄캄했어요. 희망도 없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짐작할 수 있는 것도 하나 없었지요. 애인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 버렸으니까요. 삶의 의미를 주었던 유일한 그 사람이 말이에요.
그녀는 자신 앞에 펼쳐진 이 넓은 세계도, 실연한 텅 빈 가슴을 메워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것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이 세상에 자기 혼자 있는 듯한 기분이었지요.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았지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다 가슴은 무서울 정도로 답답해 그녀는 강물에 몸을 내던지고 말았어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고통을 죽음으로 잠재울 생각으로요.
자, 알베르트, 이런게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지요!
(...)
내가 그렇게 말을 해도 알베르트는 이해가 안 되는지 반론을 몇개 더 폈지. 그중 하나는 이런 거야. 내가 말한 그 여자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여자일 뿐이며, 그렇게 꽉 막히지 않고 상황 판단이 정확한 사람이었더라도 그처럼 관대한 평가를 내일 수 있는 것인지 자신은 모르겠다고 하더군.
"선생님"
난 외쳤어. 그리고 말을 이었어.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어요. 열정이 사납게 날뛰거나 인간성의 한계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내몰리면, 행여나 그 사람에게 사리 분별력이 조금 있다고 해도 거의 영향을 못 미치지요. 전혀 못 미칠 수도 있고요. 오히려 아니,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요."
그렇게 말하고 난 내 모자를 집어 들었어. 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헤어졌어.
이 세상에서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건 정말 어려워.
p.131
1772년 1월 8일
(...)
사실 지위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가장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자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지. 그걸 모르다니, 정말 바보 같은 사람들이지! 얼마나 많은 왕들이 자기 밑에 있는 장관들에게 좌지우지되고, 얼마나 많은 장관들이 자기 비서들한테 지배당하고 있나!
과연 그들 중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누굴까? 마음먹은 바를 이루기 위해 다른 이들의 힘과 열정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을 만큼 위력과 치략이 있는 뛰어난 사람일 거야.
p.174
10월 26일
(...)
빌헬름! 그런데 두 여성은 마치 모르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더군. 난 주위를 빙 돌아보고 그 방을 주의 깊게 보았어. 주변에 있는 로테의 옷가지들, 알베르트의 서류, 이제는 퍽이나 눈에 익은 가구들도 보고 잉크별도 보았지.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
'생각 좀 해 봐라. 넌 이 집에서 도대체 무어냐! 무어냐고. 친구들은 널 존경하지! 넌 종종 그 친구들을 기쁘게 해 주고. 그 친구들이 없으면 넌 못 살 것 같지. 하지만 네가 가 버리면 어떻게 될까? 모임을 떠나면? 널 잃게 되면, 그 친구들은 자기네 운명에 구멍이 난 걸 느끼기나 할까? 느끼면 또 얼마 동안이나 느낄까?
아, 사람이 산다는 건 이다지도 덧없는 것일까? 자기 존재에 대해 굳게 확신이 드는 곳에서도, 또 자기의 존재를 정말로 깊이 새겨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곳, 즉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그리고 추억 속에서도 인간은 스러지고 사라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 순식간에!
p.176
10월 27일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서로에게 무관심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난 내 가슴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 내 머리를 박살내고 싶어져. 그런 때가 한두 번이 아냐. 아, 사랑이나 기쁨, 따스함, 환희 같은 건 내가 상대방에게 주지 않는 한, 그 사람도 내게 주지 않지. 하지만 내 가슴에 무한한 행복이 가득 들어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 주려 해도, 냉담하고 맥없이 내 앞에 서 있는 사람들한테는 어쩔 도리가 없지.
저녁
난 가진 것이 많아. 하지만 그녀에 대한 느낌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말아. 내가 가진 건 많아. 하지만 그녀가 없으면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야.
p.260
(...)
베르테르는 포도주를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에밀리아 갈로티ː 독일의 유명한 극작가 레싱이 1772년에 쓴 비극. 순결을 지키려고 자신을 유혹하는 영주를 피해 아버지의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고 아름다운 에밀리아 가로티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었지요.
(...)
베르테르는 정오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법무관이 곧바로 조치를 한 덕분에 일은 조용히 처리되었습니다. 밤 1시쯤, 법무관은 베르테르가 원했던 곳에 그를 묻게 했지요. 늙은 법무관과 그의 아들을은 유해를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로테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지요. 일꾼들이 유해를 운반했습니다. 성직자는 한 사람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미쁨책방 이야기
제목은 워낙 유명한 소설이지만, 내 책장 속으로 우연히 들어오고 난 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 책을 읽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계속해서 읽혀진다는 것은 그만큼 작품이 주는 울림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인간의 순수함, 나약함, 내면의 불안, 고통, 고독과 환희, 이성, 사랑, 무관심, 두려움, 삶과 죽음에 대한 모든 현상과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낸 서간체 소설이다.
그 중에서도 사람과의 감정의 소통에서 오는 환희와 절망에 대한 묘사들이 현실적이었다. 아주 오래 전 시대에도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성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괴테의 글에서 처럼 이 세상에서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의 전부라 여겼던 누군가는 언제 등을 돌려 내 등에 칼을 꽂을지 알 수 없으며, 때론 순수함 조차 사회제도라는 벽 앞에서 이성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냉담한 태도로 자신을 지켜야만 할 때가 있다. 또는, 나의 흠결을 자진해 내보이지 않으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상대는 자신의 우위를 선점하려 애쓴다. 이 밖의 여러 상황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고독을 자쳐하며 혼자만의 세계로 더 깊이 멀리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 애써 웃고, 애써 돕는 상황 속에서 진실한 관계는 속절없이 스쳐지나 간다.
그럼에도, 글 속의 내용처럼. 겸허한 마음으로 삶을 수용하고,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
어쩌면 그러한 노력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와, 삶의 평온을 안겨다줄지 모른다는 그런 희망을 안고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애처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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