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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_똘스또이

☆북리뷰

by mibbm_soo 2021. 2. 19.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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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4

한번은 이반 일리치가 이제 그만 가라고 하자 게라심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를 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의 이런 말에는 자기는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힘들지 않으며 또 언젠가 자기가 죽어갈 때에는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 아니겠냐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거짓말 외에, 아니 그런 거짓말 때문에 사람들이 이반 일리치가 바라는 만큼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는 점이 무엇보다 괴로웠다.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리던 중 어떤 때에는, 사실대로 고백하기 좀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누군가 자신을 아픈 어린아이 대하듯이 그렇게 가엾게 여기며 보살펴주기를 가장 간절히 소원했다. 어린애를 어루만지고 달래듯이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고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그는 바랐다. 지위가 높은 관리이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였던 그에게 누구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게라심과의 관계에서는 그 비슷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게라심과 있으면 한결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소리내어 울고 싶었고 그런 자신을 누군가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같이 울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법원 동료인 셰베끄 판사가 찾아오자 울며 동정을 구하는 대신 이반 일리치는 심각하고 엄하게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타성적으로 대법원 판결의 의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표하고는 거듭 자신의 견해를 고집했다. 그 주변의, 그리고 그 자신의 이런 거짓말이 이반 일리치의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p.117

바로 그때 누군가 그의 손을 잡고 입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뜨고 아들을 보았다. 아들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아내도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크게 벌린 채 코와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도 불쌍했다.

'그래, 내가 모두를 괴롭히고 있구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두 참으로 안됐어. 하지만 내가 죽으면 훨씬 나을 거야.'

(...)

가족들이 모두 안쓰럽게 여겨지고 모두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도 벗어나고 가족들도 다 벗어나게 해주어야 했다.

(...)

그는 오랫동안 곁에서 떠나지 않던 죽음의 공포를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죽음은 어디에 있지? 죽음이 뭐야? 죽음이란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제 그 어떤 공포도 있을 수 없었다.

(...)

"임종하셨습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에 되뇌었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고 온몸을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p.139

[작품해설]

이 작품의 서사구조는 아주 간단하다. 판사로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가 성공의 정점에서 갑자기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어간다. 서서히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인생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고통스럽게 되묻는다.(...)

다른 사람들에 눈에 비친 이반 일리치의 삶은 조금 다른 모습이다. 그의 죽음을 대하는 동료들과 아내, 친지들, 게다가 의사들의 태도에서는 이반 일리치는 진정 인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거나 애도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자랑하는 '품위'를 가진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저 이해관계 속의 한 존재에 불과하다. 아내와 딸 역시 자신들의 사치와 사회적 신분을 지켜주고 유지하게 해주는 존재로서만 이반 일리치를 받아들이고 있다.

다른 한편, 이반 일리치가 죽음의 과정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인생을 새롭게 생각하는 것, 즉 반성적 삶의 양상이 또다른 하나의 삶의 모습으로 독자에게 제시된다. 이반 일리치는 처음에는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가를 거듭 물으며 신과 운명을 저주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남들보다 먼저 죽어야 할 이유가 없고 크게 잘못한 일도 없다. 주변의 그 누구도 자신의 고통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의사는 치료에 대한 분명한 확신도 없으면서 온갖 현학적 의견을 제시하기에 바쁘고 아내와 딸도 각자의 입장에서 그를 불편해하기만 한다. 이반 일리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하며 더욱 고통 속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결국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반 일리치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인생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의 문을 통과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아들을 불상히 여기며 아내를 용서하는 마음이 들자 이내 그를 괴롭히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고통도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당대 러시아 사회의 일반적인 삶의 기준대로 살아온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이며 용서와 사랑 속에서 인간적 삶의 새로운 감촉을 얻은 뒤에 이반 일리치는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이다.(...)

무엇보다 똘스또이는 일상적 삶의 크기와 인간의 존재의미 사이의 간격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여러 등장인물들 모두 자신의 외적 태도와 심리 사이에 대립성과 모순성을 가지고 있다. 이반 일리치 역시 자신의 외적인 삶과 내면의 삶 사이에 불일치하는 모습을 항상 보여준다. 이런 불일치를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존재의 끝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극적인 대립뿐만 아니라 인간의 일상적 삶의 모든 계기에 늘 잠재되어 있다. 어쩌면 그것은 무한히 확대된 근대 인간의 삶의 외연과 무한히 멀어진 존재의 의미 사이의 간격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쁨책방 이야기☆

치열한 삶 속에서의 '(적당한)내려놓음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로 난 이 소설을 이해했다.

인생에서 짊어진 많은 짐과 이루어야할 그 모든 것들은 과연 나의 생이 다하는 날이 무작정 찾아왔을 때조차도 그만큼의 가치를 발하고 있을까?

현실에서 뒤처지고 싶지 않은 욕심 그리고 수많은 비교대상들과 경쟁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 속에서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생의 마지막에 나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주고 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그 '(적당한)내려놓음'과 맞바꾼 '마음챙김의 시간'은 결국 내 삶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까지도 더 평온하게 만들지 않을까.

 

어쩌면 이반 일리치가 이토록 죽음을 앞두고 가족과 지인, 의사들 모두가 거짓말쟁이라는 불신등의 괴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된 것은 그 역시도 그러한 태도로 삶을 대했기 때문이며,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곁을 내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그의 깨달음이 단지 너무 늦었을 뿐......

하지만 이 책은 어쩌면 그것이 인생이고, 죽음이라고 말하는 듯하기도 해 더욱 삶의 본질과 슬픔이 깊게 묻어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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