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76
야구든 럭비든 하키든, 가호는 스쿠이 옆에서 보는 경기가 좋았다. 미련은 아니다. 지금 여기에 쓰쿠이가 나타난다 해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다 지난 옛날 일이다.
p.177
시간이 저렇게 무정하게 흘러가면서, 어떤 곳에서는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척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아주 흐름을 멈춘 척한다. 그래서 모두들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라고 시즈에는 생각한다.
p.354
"홍차 마실 거지?"
지금 커피 마시고 있는데, 하고 대답하는 나카노보다 빨리 가호는 옷장 위에서 청포도 상자를 꺼냈다.
"비장의 잔에 마시게 해줄게."
상자 속에는 파란색의 아름다운 장미 무늬 홍차 잔이 들어 있었다.
[작가 후기]
p.356
옛날부터 어째서인지 여분의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죠.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 그 사람의 이름이나 나이, 직업이 아니라 그 사람은 아침에 뭘 먹을까, 어떤 칫솔을 사용할까, 어렸을 때 과학과 사회 중에서 어떤 과목을 더 잘했을까, 찻집에서는 커피를 주문할까 홍차를 주문할까, 또는 어느 쪽을 더 많이 주문할까, 그런 것들에 더 관심을 쏟습니다.
여분의 것, 하찮은 것,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그런 것들로만 구성된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여분의 시간만큼 아름다운 시간은 없지요.
[작품해설]_1998년 1월 영화평론가, 미국문학가 -사이토 에이지-
p.361
(...)그런 에쿠니 가오리 씨의 매력이 「홀리가든」에도 충분히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카노 사토루란 인물이 인상적이다. 여주인공인 가호를 사랑하는 이 청년은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놀랄 만큼 낙천적으로 가호를 흠모한다. '충견 사토 공'이란 불명예스러운 별명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자는 것을 알아도 질투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의 상식으로 보면 좀 이상하다. 그런데 작가는 이 청년 역시 사랑스러운 존재로 그리고 있다. 실제로 이 청년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그 꿋꿋한 모습에 흐뭇해지고 말았다.
물론 두 여주인공 가호와 시즈에도 좀 이상하다. 가호는 5년 전에 끝난 사랑의 상처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시즈에는 연상의 남자와 불륜 관계에 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눈살을 찌푸릴 삶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녀들의 삶을 부정하지 안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랑의 한 형태로 그리고 있다.
이런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보면 사회의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쿠니 씨는 그런 소수의 인물들에게 한없는 애정을 보인다. 그녀들 삶의 매력을 살며시 보여준다. '이런 사랑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듯. 이렇게 상식에 구애디지 않는 시선이 에쿠니 씨의 소설에 자유로운 숨을 불어넣는다.(...)
「홀리가든」에서 나카노 사토루가 가호에게 쏟는 감정 역시 연애 감정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그것은 보다 너그러운 감정이다. 시즈에와 전 애인인 쇼노스케 사이도 그렇다. 연애란 틀에 갇히지 않은,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 영어로 하자면 'love'보다 'affection'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데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다. 에쿠니 가오리 씨는 이렇게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로 교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켜준다.
[역자후기]_김난주
p.365
(...)
때론 삶의 언저리에서 천천히 흘러가는 그런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은 삶이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치열함과 격렬함과 고통 스러움을 외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잠시 일상을 떠나 여행을 하듯 나 자신을 떠나고 싶기 때문이겠지요.
비스킷 깡통 속에 옛 사랑을 담아놓고 무심하게 현재를 사는 가호처럼 말이에요.
그래요, 이번 소설은 삶의 언저리에서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사는 가호와 그녀의 오랜 친구인 시즈에의 이야기입니다.
작가가 그녀 둘이 공유한 시간을 아름답다고 한 것은,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 자체의 소주암보다는 그 시간들이 비추어내는, 또는 명징하게 드러내주는 삶의 긴장된 시간과 그 귀중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즈에가 애인을 만나기 위해 자기 삶의 중심인 도쿄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라시키로 내려가, 며칠 동안의 짧은 밀회를 즐기고 돌아오는 신칸센 속에서 일찌감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면 말이죠.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5년 이란 긴 시간을 자신을 떠나 사는 가호에게도 언젠가는 자신의 삶을 꼭 껴안는 날이 오겠지요. 사람이란 사랑의 상처가 아무리 아프고 괴로워도, 또 그 때문에 무너진 삶의 나락이 아무리 깊고 어두워도 시간이 흐르면 분연히 딛고 일어서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미쁨책방 이야기☆
이렇다할 주요 사건없이 등장인물들의 일상과 생각이 오가다보니 다른 에쿠니가오리의 이야기처럼 쉽게 몰입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사회적 통념상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이야기이다보니 조금의 거북스러움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관계를 싫어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니......
하지만 어쩌면 또 그들 역시 힘겹게 자신의 삶을 붙들고 살아가는 나약한 사회적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끝까지 소설을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관계에서의 감정이라는 것이 합일되어가는 과정 속에는 무수한 난관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은 아마 드러낼 수 없는 절박함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많은 관계는 위태로움을 껴안고 애써 태연한 척하며 서서히 중심을 잡아가는 쓸쓸함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튼, 에쿠니 가오리의 섬세함은 이 소설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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