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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_김원영

☆북리뷰

by mibbm_soo 2021. 12. 5.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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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1

장애인에게 편의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는 것은 그저 장애인을 배려하라는 말이 아니라, 장애인이 신체적, 정신적 특성을 가지고 오랜 기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존중하라는 요구와도 같다. 따라서 합리적/정당한 편의 제공은 장애인이 사회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서 자원 분배를 평등하게 하는 정의 실현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정의만의 문제라면, 계단이 10개 있는 회사에 장애인이 다니게 되었을 때 동료 직원들이 그 장애인을 번쩍 안거나 업어서 사무실까지 옮겨주는 것만으로도 '정당한' 편의 제공이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은 '정당한 편의 제공'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그런 방식은 장애인을 사무실로 들어가게는 하지만, 그가 휠체어를 자기 몸의 일부로, 일종의 '스타일'로 삼아 오랜 기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으로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p.284

연극은 내가 경험한 세계에서 제시할 수 있는 작은 예에 불과하다. 장애인들은 많은 경우 사진 속에(정치인들과 함께) 등장하지만 '초상화'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 장애를 가진 신체는 물리적으로 집 밖으로 나오기 힘들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오래 누군가와 교류하기도 어렵다. 편견이나 차별 의식 등 오래되고 누적된 강력한 고정관념의 지배도 받는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힘을 모은다면 이런 조건을 바꿔낼 수 있다. 일상을 기획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법과 제도는 어떤가? '매력차별금지법'은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울 기회 평등법'은 가능하다.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한 학교에서 오랜 시간 함께하기, 어떤 중증의 장애인이라도 거리에 나오기 편한 환경 만들기, 이들이 자기 서사를 충분히 말할 수 있게 하고 그 말을 듣는 시간 배정하기, TV프로그램에서 구체적이고 섬세한 감정과 표정을 드러내는 장애인 캐릭터를 만날 기회를 제공하기, 공식적인 회합뿐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가급적 모든 사람이 소외되지 않고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상호작용의 기술을 공유하고 의사소통 규범을 준수하기, 장애아의 부모, 형제자매, 연인, 친구, 이웃이 쓴 글을 진지하게 읽고 정치적 목소리에 힘을 싣기.

이 모든 실천은 자기를 표현하는 데 제약이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화가'들 앞에 자기 초상화를 맡길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렇게 그려진 초상화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와 신념, 성향, 몸의 질량과 부피, 비율과 신체의 곡선, 색깔과 향기, 목소리를 모두 종합할 것이다.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이 있다면 적어도 당신과 나의 신체도 얼마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 연예인 뺨칠 정도는 아닐 테지만.

P.312

예의 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손길, 무시와 냉대 속에 혼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 숙여 말을 거는 순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보려는 미적·정치적 실천. 그런 것들이 모여 자기 삶의 조건을 수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하고 탁월한 자아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을 언어화하고, 법적인 권리로 만들고, 품위와 겉모양만 중시하는 품격주의자들의 세계에 구멍을 낸다.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은 이제 법률이 되고, 헌법이 되어 우리 공동체의 최고 규범이 된다.(...)

존엄의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미쁨책방 이야기☆

장애를 안고 살아 간다는 상상을 해보면, 나는 '얼마나 많은 좌절과 슬픔을 감내하면서 살아야 할까' 하는 섬뜩함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과연 '삶의 모든 불편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나를 얼마나 지탱시켜줄지 모르겠다'는 나약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것은 과연 장애 그 자체임이 문제여서일까? 아마 그건 사회속의 불평등, 아직은 미흡한 법과 불편한 교통시설과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라곤 찾기 힘든 건물들, 곱지 않은 세상의 시선들등... 무수히 많은 사회적 문제들과 싸워내기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못한 일들이 더 많다고 느껴지는 두려움과 절망감이 먼저이기 때문인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갖고 살아가기에 어려서부터 장애인과 함께 비장애인이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환경과 시설들을 갖추고, 그들도 자신만의 서사를 써내려갈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그들이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당연한 존엄성을 가지고 장애를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사회와 소통하며 자신의 역할과 개성을 빛낼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할 토대를 만들어 주어야한다. 그것은 결국 사회에도 긍정적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한 과정이 구축되어 가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도 장애가 닥쳐올지 모르는 어느 순간 나를 지탱하게 만들어 주는 최소한의 용기와 힘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회적 편견에 따른 인식개선뿐 아니라, 그들과 하나되어 생활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 속에서 서로 화합하고 배우며,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모두가 나약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서로를 인식하고 보듬어 나가는 과정. 더디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야할 과제가 아닐까(과제라는 표현도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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