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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_오가와 요코

☆북리뷰

by mibbm_soo 2021. 5. 1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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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p.17

과거에 일하다 잘린 파출부 아홉 명에게 얘기를 들으면서 조금씩 정보를 모아보니, 안채에 사는 노부인은 미망인이고 죽은 남편과 박사가 형제인 모양이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는데도 박사가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까지 가서 수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남긴 직물 공장을 고생고생 키워 한참 나이 어린 동생을 위해 학비를 대준 형 덕분이었다. 박사 학위를 딴(그는 명실상부한 박사였다) 박사가 대학의 수학 연구소에 취직하여 가까스로 자립하게 되었을 때 그만 형은 급성간염으로 죽고 만다. 남은 미망인은 자식이 없는 탓에 공장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세우고 임대 수입으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박사 나이 마흔일곱 살에 당한 교통사고가 이 두사람의 평온한 생활을 뒤집어놓았다. 반대 차선에서 졸음운전을 하던 운전자의 차가 박사가 운전하는 차에 충돌, 박사의 뇌는 회복이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고 그 결과 직장을 잃었다. 그 후 결혼도 하지 않고 수학 잡지의 현상문제에 응모하여 푼돈을 버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입도 없이 예순네 살인 지금이 되도록 줄곧 미망인의 원조를 받으며 살아온 듯했다.

p.164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눈에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

p.184

그는 루트를 소수만큼이나 아꼈다. 소수가 모든 자연수를 있게 하는 근원이듯, 아이는 어른에게 필요불가결한 원자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도 다 아이들 덕분이라고 믿고 있었다.

가끔, 나는 메모지를 꺼내 본다. 왠지 잠이 오지 않는 밤, 혼자 있는 저녁 시간.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을 때. 거기에 쓰여 있는 한 줄의 위대함에 고개를 숙인다.

p.217

아무튼 일단 종결된 증명에 관해서는 놀랍도록 담담하다. 있는 힘을 다 기울인 대상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쪽을 돌아보는 순간, 조심스럽게 입이 무거워진다. 자신이 얼마나 정열을 기울였는지도 피력하지 않고, 보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정말 완전한지 아닌지를 확인한 후에는 그저 말없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수학에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 다친 루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을 때도, 몸을 던져 파울 볼을 막았을 때도, 고마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줄 몰랐다. 고집이 세서도 아니고, 마음이 삐뚤어져서도 아니고, 그저 왜 그렇게 자신에게 고마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p.259

박사의 행복은 계산의 어려움에 비례하지 않는다. 아무리 단순한 계산이라도, 그 정확함을 함께할 수 있어야 우리의 기쁨도 배가되었다.

"루트가 중학교 교원 시험에 합격했어요. 내년 봄부터 수학 선생님이에요."

나는 자랑스럽게 박사에게 보고한다. 박사는 몸을 쑥 내밀고 루트를 껴안으려고 한다. 들어올린팔은 갸냘프고 힘이 없어 부들부들 떨린다. 루트는 그 팔을 잡고 박사의 어개를 껴안는다. 가슴에서 에나쓰의 카드가 흔들린다.

배경은 어둡고, 관람객도 점수판도 어둠에 가라앉아 있는데 에나쓰의 모습만 찬란한 빛 속에 있다. 지금 막 왼손을 휘두른 순간이다. 오른발을 굳건하게 마운드를 밟고, 모자 챙 속에서 번득이는 눈은 캐처 박스로 빨려 들어가는 볼을 응시하고 있다. 마운드에이는 흙먼지가 볼의 위력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빠르게 볼을 던졌던 시절의 에나쓰다. 세로줄 무늬 유니폼을 입은 어깨 너머로 등번호가 보인다. 완전수, 28이다.

p.263

<옮긴이의 말 중>

재미는 우선 설정과 소재의 신선함에 있다.

기억이 어느 한 시기에 멈춘 수학 박사, 그의 기억은 현재 속에서는 80분 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한 시기 이전과 이후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오직 숫자밖에 없다.

이런 인물 성정은 어뜻 신선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오가와 문학이 지금까지 보여준 키워드들의 집대성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이 작품의 무게가 있다.

오가와, 그녀는 데뷔 이래 줄곧 '병'을 천착하고 있다. 이때 병은 아픔이며 결여이며 폐쇄된 인간관계다. 이런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가 생겨난다.

이쪽은 현실이고, 저쪽은 병에 침식된 세계다.

박사의 병은 기억이 어느 한 시점에서 끊겨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 기억의 세계를 사는 현실 속의 박사는 이쪽에 있고, 기억이 끊어진 시점 이전의 박사는 영원히 지속되는 기억의 세계인 저쪽에 있다.

저쪽 세계에는 그의 영원한 애인인 미망인(죽은 형의 부인)이 있고, 이쪽 세계에는 박사의 생활을 돌봐주기 위해 드나드는 파출부와 그의 아들 루트가 있다.(...)

숫자로 이어지는 대화와 수학 수업을 통해 박사와 파출부, 그녀의 아들 루트 사이에서 싹트는 인간애가 눈부시다. 그리고 야구를 통해 박사의 과거의 기억을 퍼 올리고 공유하는 파출부와 루트의 노력이 애틋하고 눈물겹다.

끝내 박사는 기억의 저편으로 묻혀버리지만, 파출부와 루트의 기억 속에서 숫자의 영원함을 사랑하듯 아이들의 무구함을 사랑했던 박사에 대한 기억이 완벽하고도 영원하게 살아남아 있으리라.

☆미쁨책방 이야기

젊은 시절 사고로 현재의 기억이 80분 밖에 지속되지 않는 박사. 양복에 잊어버려선 안되는 메모들을 붙이고, 그것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박사의 기분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매일 오는 파출부의 얼굴을 잊고 그의 아들과의 추억은 매일이 새로움의 연속이다.

파출부와 아들 루트는 매일 반복되는 박사의 질문과 행동에 당황하고 지칠 법도 한데, 그런 그를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며 그가 살아온 삶과 업적에 대한 존중감을 표한다.

'어떻게 사는냐'는 '누구와 사느냐'와 같은 맥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불의의 사고로 80분의 기억만을 안고 살지만 그의 옆에는 자신을 늘 새롭게 소개하고 그를 존중하는 파출부와 루트가 있고, 또 파출부와 루트에게는 80분의 기억 속에서 늘 자신과 아들에게 따듯한 시선을 묵묵히 보내주는 박사가 있다. 그들이 가진 인간애는 결국 상처를 가진 그들이 함께 소통하고 삶을 살아가는데 희망의 빛과 온기가 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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