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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_정유정

☆북리뷰

by mibbm_soo 2021. 5. 9.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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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p.46/ 김민주

나로 말하자면, 삶이 시시해지는 병에 걸렸다. 사는게 적성에 맞지 않는 것도 같았다. 미래는 개꿈보다 허망한 단어로 들렸다. 목적도 없고, 욕망도 없는 이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죽지 않으려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게 돼 있는 삶인데. 꾸역꾸역 버텨봐야 일생을 고시원에서 살다 고시원에서 죽을 게 빤해 보이는데. 자판기 아저씨처럼.

p.77/ 이진이

내가 무엇을 꿈꾸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뭘 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다루고 연구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그날 밤 알아차렸다. 길 건너 골목에 숨어 그 아이가 철장에 갇힌 채 삼륜차에 실리는 걸 보던 순간에, 삼륜차가 비바람 속으로 사라져버리던 그 순간에.

p. 266/ 김민지

온갖 질문들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진이가 다정한 그녀에게 돌아간다'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과연 동의어일까. 진이가 돌아가는 순간, 정말로 다정한 그녀가 반짝 눈을 뜨며 일어날까? 지니는 꿈의 그물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올까? 만약 그 반대라면, 그러니까 진이가 돌아갔을 때 다정한 그녀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지니는 영원히 꿈의 세계에 갇히게 될까? 돌아가기 전에 다정한 그녀의 심장이 먼저 멈춘다면 진이는 어떻게 될까. 영원히 교차 상태로 살아가게 될까?

도무지 답할 길이 없는 질문들이었다. 진이 역시 그렇겠지. 자신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쓰는 중이겠지. 그녀가 불시에 램프로 불려가는 건, 어쩌면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지니의 무의식적 안간 힘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과는 별개로, 지니의 몸은 삶을 두고 벌어지는 두 자아의 전쟁터인 셈이었다.

p.287/ 이진이

그렇다.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지니에게 주었어야 할 것은 파인애플이 아니었다. 구조의 손길이었다. 내 이름을 알려주고, 말을 걸고, 다정하게 달랠 시간에 구조 요청을 했어야 옳았다. 최소한 가게를 빠져나온 후에라도 용기를 냈어야 했다. 그랬다면 우리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지니는 한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고, 나와 인동호에서 재회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죽음의 순간에 내가 지니 안으로 뛰어드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p.344/ 이진이

내게 돌아간다는건 죽음을 택한다는 의미였다. 돌아가지 않겠다면, 지니의 삶을 훔쳐야 할 것이다.

이 냉정한 진실을 나는 냉정한 심정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에 앞서, 무서웠다.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두려웠다. 돌아가는 것도, 돌아가지 않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쳐 와서 이성과 통제력을 한 손에 쓸어갔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미치광이처럼 철장 안을 굴러다녔다.

나를 사지로 밀어뜨리고 당신만 살아남은 스승에게 묻고 싶었다. 내게 왜 그랬느냐고. 이런 선택을 강요하는 운명에게 묻고 싶었다. 내게 왜 이러느냐고.

p.355/ 이진이

나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맞붙이고, 마지막 순간에 손을 빼버리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순간, 내 몸이 꿈틀 움직이며 손을 맞잡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현기증이 나고, 불빛이 사라지고, 방안 사물들이 소용돌이치듯 휘돌았다. 병실 바닥이 발밑에서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커튼이 닫히듯, 시야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윽고 완전히 닫혔다.

어둠이 찾아왔다.

p.367 / 김민주 (에필로그 중)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정자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눈보라에 갇힌 물길을 내려다봤다. 새벽녘, 이팝나무 꽃을 따러 팽나무 숲으로 들어가던 그녀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어디쯤에 가 있을까. 소망하던 곳에 가닿았을까. 그리하여 곧 돌아올 지니를 기다리고 있을까. 불현듯, 편지의 마지막 줄이 기억났다.

나와 지니는 너를 오래도록 기억할 거야. 네 형편없는 노래도.

p.380 (작품해설 중)

진이는 지니의 몸으로 들어간 이후, 처음에는 자신이 지니의 몸을 통제하는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점점 지니의 의식과 무의식이 복잡하게 혼재된 불가해한 공간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점점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지만 그 마지막 시간은 단지 슬프고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가 서로의 눈물의 뜨거운 질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다는 것, 작품 제목 '진이, 지니'처럼 두 존재의 경계가 거의 사라져 서로의 상처 속으로 깊이 스며들며 더 이상 '너와 삶과 나의 삶'이 구별되지 않는 산태로까지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고통이 찾아와도, 그야말로 질기게 버티며 평생 홀로 딸을 키우는 것에서 유일한 기쁨을 찾았던 진이의 착한 어머니처럼, 이제 누구보다 용감해진 민주의 도음을 받아 보노보를 추적하는 사람들을 따돌리고, 병원 침대에 누워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 속으로 기꺼이 들어간다. 그것은 읽는 이에게 삶의 포기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다가온다. 진이와 지니가 하나된다는 것. 그것은 단지 '진이의 죽음'이 아니라 콩고의 밀림 저 머나먼 곳에서 누군가 아기를 낳기라도 하면 온 이웃들이 다 모여 산모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보노보들의 정겨운 공동체 속으로, 마침내 보노보 지니를 다시 되돌려 보내는 아름다운 통과의례다. 동생이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온 숲을 헤매며 엄마와 아기를 위해 선물을 가져와 '까꿍 놀이'를 하는 천진난만한 보노보 지니를 그녀만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콩고의 밀림 속으로 돌려보내는 아름다운 제의가 치러지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위대한 진화보다도 값진 선택이며, 자신의 트라우마를 승화시켜 타자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에너지로 만드는 위대한 용기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 정유정이 지닌 가장 따스한 모성의 얼굴을 만난다. 가만히 다짐해본다. 아무리 삶이 각박해지더라도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공생과 공존의 가치를 붙들어야 한다고. 우리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생의 온기를 지켜내고, 우리가 반드시 닦아주어야 할 고통받는 타자의 눈물을 잊지 말아야 함을. 그들도 우리처럼 아프고, 눈물 흘리고, 슬퍼하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 타자의 아픔에 귀를 기울여줄 마음의 온기가 남아 있다면, 모든 것을 효율성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이 잔혹한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나의 아픔을 누군가 진심으로 알아 준다면, 힘들 때 등허리를 쓸어주는 딱 한 사람만 있다면, 우리 삶의 이야기는 완전히 새로운 빛깔로 다시 시작될 수 있음을 아는, 바로 당신이 있다면. <진이, 지니>는 우리 안의 가장 따사로운 공감과 치유의 햇살을당신의 상처 가득한 심장 깊을 곳까지 실어나를 것이다.

p.386 (작가의 말 중)

<죽음, 지속의 사라짐>에서, 저자인 최은주 박사는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모든 위험을 받아들이면서도 삶을 총체로서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단지 '무'로 만들지 않는 길이다. 그것이 죽음의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언젠가는 반드시,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순간이 온다. 운명이 명령한 순간이자 사랑하는 이와 살아온 세상, 내 삶의 유일무이한 존재인 나 자신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때가 오기전까지, 치열하게 사랑하기를. 온 힘을 다해 살아가기를······.

☆미쁨책방 이야기☆

- 대략적 줄거리:

킨샤사에서 보노보를 발견하고도 구해주지 못했다는 (직업적)죄책감을 가진 진이. 그 보노보를 한국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구출하게 된다. 그 보노보에게 스승은 'Jinny'란 이름을 짓는 것이 어떤지 제의하고..... 그렇게 진이는 지니를 품에 안고 스승과 차를 타고 가던중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진이는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게 된다. 진이 어느 시점에서부터 지니의 몸 속에서 진이로 나타나며 지니의 몸 속에서 진이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사람 진이의 삶이 중환자실에서 끝나기 전에 자신을 만나 생을 마감해야할지의 선택을 앞둔다. 그리고 그런 진이와 지니의 모습이 교차로 나타나는 혼란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진이를 마지막까지 도와주는 인간 김민주. 결국 진이는 중환자실에 누워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자신의 손을 꼬옥 쥐고 인간 진이로서의 삶을 마지막을 선택한다.

한편의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듯한 소설이었다. 장면 장면이 영상이 되어 살아숨쉬는 듯한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되도록 밥벌이를 못한다는 이유로 검은 배낭하나 메고 집에서 쫓겨나 고시원과 거리를 전전하며 살고 있던 김민주. 우연히 동물과 교감하며 웃고 있는 '다정한 그녀' 이진이를 알게 되고, 진이와 스승의 사고 현장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지니의 모습을 한 진이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에게서 진이는 아무 목적 없는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되어 줌으로써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준다.

지니를 구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졌지만 누구보다 사육사로서의 자신의 일을 사랑했던 그녀 이진이. 어쩌면 그 죄책감은 그만큼 사명감과 사랑이 강했기에 생겨난 것이라 생각한다. 지니 속에서 진이로 있었던 몇 일의 시간동안 진이는 지니의 삶을 온전히 아파했고, 지니가 콩고의 밀림으로 돌아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결국, 상처받은 누군가는, 인생의 한 장면에 불현듯 나타난 누군가를 통해 살아갈 용기를 얻고, 또 그것은 돌고 돌아 누군가의 가슴에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져 꽃을 피운다. 그 꽃이 비바람에 져버리더라도 꽃씨는 언제가 다시 생명을 틔우고, 자신만의 향기를 전하며 삶을 살아 낸다. 부디 그 향기가 멀리 전해지기를 바란다. 우리 삶이 다하는 예상치 못한 그 순간까지 말이다.

*작품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책의 뒷면에 상세하고도 깊이 있게 다루어져 있다. 어쩜 같은 책을 읽고도 이렇게 사고의 밀도가 클 수 있을까. 감탄했다.

(글 재주에 큰 스트레스 받지 말고 오늘은 편히 쉬다 자는 것을 택한다. 내일 출근이 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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