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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_최은영

☆북리뷰

by mibbm_soo 2023. 2. 1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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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p.130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p.228

그를 찾아가면서 할머니는 적어도 그가 자신을 보고 놀라거나 두려워할 줄 알았다.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할 뿐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할머니를 속였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곤 한다고 했지만 결론은 늘 한 가지였다. 그는 그럴 수 있어서 그랬던 것뿐이었다.

(...)

"저도 사과받지 못했어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하고 말았다.

"저를 속이고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걸 제가 알게 되었는데도 도리어 제 탓을 했어요."

"······"

"저에게서 이미 마음이 떠났고 마음 떠나게 한 제 탓이래요. 진작에 헤어졌으면 바람피울 일도 없었을 거래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목이 메어서 잠시 말을 멈췄다.

"미안해, 미안해, 소리지르고는 그게 사과래. 할머니, 제가 바랐던 건 진실한 사과였어요."

"안다, 내가 알아."

"계속 같이 살 수 없었어요."

(...)

"언젠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날이 올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정말 그럴 거야."

할머니가 말했다.

p.235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것이 남편이 나를 떠나면서 문을 닫는 소리라는 것을 안다. 너만은······ 너만은 나를 떠나지 않을 줄 알았어. 나는 바닥에 앉아서 몸을 떨며 운다.

지연아.

그때 내게 앞니 두 개가 빠진 여덟 살의 언니가 다가와서 등을 두드린다.

지연아, 지연아.

언니가 나를 부를수록 세상이 환해진다.

태양이 커지고 있나봐.

나는 좀전까지 울던 일을 잊고 언니에게 말한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셔. 어떻게 이렇게 밝을 수 있어?

내 말에 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환한 빛 속에서 소리 내며 웃는다.

바보야.

언니가 말한다.

바보야, 난 널 떠난 적 없어.

p.249

대놓고 할머니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가 감쪽같이 속였을 리는 없다면서, 할머니도 분명 그에게 조강지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했으리라는 것이었다. '여자도 잘한 건 없다.' 그것이 사람들의 중론이라는 것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

ㅡ남자 마음 하나 잡지를 못해서 빼앗겼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

할머니는 눈을 감고 그가 쏟아내는 말의 매를 맞았다.

ㅡ 그 말 다시 해보시오.

곁에 앉아 있던 증조모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ㅡ 한번 더 그런 말 했다가는 당신 내 손에 죽습니다. 영옥이한테 그따위 소리 할 거면 내 눈앞에서 꺼지란 말입니다.

(...)

ㅡ 내가 당신한테 도망가자 했시까, 내가 당신 부모 저버리라 했시까, 내가 당신보고 혼인하자 했시까, 기런데 왜 내를 일평생 입 닥치고 살게 했시까? 내 죄가 뭐인데. 백정의 딸로 태어난 게 죄라면 내 죄를 죄로 두지 기랬어요. 우리 영옥이. 내 살 같은 영옥이를 쥐 잡듯이 잡고 화풀이하고 이렇게 다친 아이를 말로 두드려 팰 거면, 이 꼴을 내 눈으로 보게 할 거면, 내를 기냥 삼천에 내버려두지 기랬어요. 내를 당신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내버려두지 기랬어요.

ㅡ 내레 너가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널 단 한 번도 친 적 없다.

ㅡ 기게 지금 자랑입니까?

그러자 증조부가 바닥에 있던 책을 집어들어 증조모에게 던지려는 시늉을 했다. 증조모가 두 팔로 머리를 감쌌을 때 할머니가 마른 입술을 열었다.

ㅡ 아바이, 죽어버려요. 우리 눈에 띄지 말고 죽어버리란 말입니다.

그 말에 증조부가 들고 있던 책으 바닥에 내려놓았다. 증조모도 할머니를 가만히 바라봤다. 할머니는 물집이 잡힌 것처럼 부은 눈으로 증조부를 쳐다봤다.

ㅡ 당신 돌아가셔도 내레 흘릴 눈물은 없습니다. 아바이 산소에도 걸음하지 않을 거고, 내는 아바이를 잊을 겁니다. 기러니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우리 없는 곳에서 죽으란 말입니다.

그 말은 그 순간의 진심이었다. 그런 말은 속으로라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어버이를 귀하게 대해야 한다는 건 할머니에게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절대적인 법이었지만, 할머니는 그 순간 그 법을 깨뜨렸다. 증조부에게 화가 나서도 아니었고, 증조부를 공격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절망 때문에 증조부에게 그렇게 말했다.

증조부는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속초의 한 대로변에서 버스에 치여 죽었다. 

p.251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를 자기 딸이랑 맺어준 사람이에요. 그것도 모자라 남편이 떠난 게 할머니 탓이라고 했고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할머니 친아버지가."

"그래"

"너무 상처받아서, 아파서 소리를 지른 게 죄가 될 수는 없어요."

"알아. 잘 알고 있어. 그냥. 그럴 때가 있었다는 거야. 마음이 나에게 박하게 기울 때가 있었어. 그래도 지연이 너한테 고마워."

(...)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누군가를 죽어버리라고 소리지를 수밖에 없는 마음을 생각했다. 전남편이 내게 끝내 사과하지 않았을 때, 나도 그에게 죽어버리라고 말했다. 전에는 입에 담지 못했던 온갖 폭력적인 말을 하면서 나는 그 말에 내가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내 말에 상처받거나 가책을 느끼지 않았으니까. 내가 뱉은 말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매끈한 표면에서 튕겨나와 나를 쳤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p.256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희자를 생각하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배움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것, 아무것도 꿈꿔보지 않았다는 것, 결혼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것, 일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위해서 단 한번도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할머니는 그저 부끄러웠다. 할머니의 모든 선택이 그때로서는 합당하고 이치에 맞는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p.271

엄마는 내게 할아버지가 자기가 태어난 직후에 돌아가셨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 말은 거짓이 아니기도 했다. 그는 엄마에게 단 한순간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테니까. 부모 역할을 한 건 할머니뿐이었으니까.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아빠와의 결혼으로 자신도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되어서 좋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던 엄마를 예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p.298

그의 외도를 알기 전의 나는 정말 내 믿음대로 덜 아프고 덜 병들어 있었을까.

나는 그와의 결혼으로 내가 지닌 문제와 내가 가진 가능성으로부터 동시에 도망치고자 했다. 나의 원가족으로부터, 해결하기 어려워보이는 상처로부터, 상처받을 가능성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 이혼 후 내가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은 남편의 기만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의 결과이기도 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보니, 그 중 나를 더 아프게 한 건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이었다. 

p.312

"어느 날 미선이가 전화해서 말하더라.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고. 너희 아빠를 데리고 희령에 왔지. 난 이서방이 별로 마음에 차지 않았어. 하지만 미선이가 좋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그런데 하룻밤 자고 가면서 이서방이 그러는 거야. 미선이 아버지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다면서 자기가 부모님을 잘 설득하겠다는 말이었지. '그럼 자네 집에서는 미선이를 아직 허락하지 않은 건가' 내가 물었더니 고개를 숙이더구나. 이서방을 앞에 두고 이야기했어. 우리 미선이가 환영받지 못할 결혼 하는 거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소용없었지. 결혼은 그대로 진행됐어. 상견례장에서 난 사돈 되는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함을 표해야 했다. 부족한 저희 딸을 받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할머니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이 그랬어.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시댁에 책잡혀서 좋을 게 뭐가 있니. 아버지 문제로 이미 책잡힌 딸이 나 때문에 공연히 더 난감해지는 걸 바라지 않았지. 지는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지. 그게 미선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는게 이기는 거다.' '너를 괴롭힌다고 똑같이 굴면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 패배감에 젖은 그 말들. 어차피 맞서 싸워봤자 승산도 없을 거라고 미리 접어버리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을 얼마나 경멸했었다. 그런 마음에 물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쳐야 했었나.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상견례 자리에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내 본심이 아니었어. 집에 돌아와서 미선이에게 전화했지. 네가 뭐가 모자란 게 있어서 결혼하기 전부터 숙이고 들어가야 하느냐고. 너를 존중해줄 남자와 가족을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결혼을 준비하는 애가 얼굴이 왜 점점 더 안좋아지고 야위어가느냐고. 그리고 말했지. 나는 미선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술 취한 목소리로 '행복이요?'라고 반문하더니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할머니는 엄마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불안해졌다.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나는 이게 꿈이에요. 남들은 그냥 하는 일도 나에게는 힘든 일이에요.

엄마의 말이 할머니에게는 자신을 원망하는 것으로 들렸다.

☆미쁨책방 이야기

친한 지인에게 선물받아 읽게 된 책이다. 

나,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삶에 관한 스토리이고 그 중의 대부분이 결혼 생활에 포커스가 맞추어진 느낌이다. 서로가 가진 결핍과 아픔을 때론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상처를 주는 관계로 변질되기도 하는 것이 가족인 것 같다. 그 바탕에 애정을 깔고 있고 누구보다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구성원을 충족시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 아프기도 하다. 나 역시 그런 상처를 주고 받았었다.

결과적으로 손녀와 할머니의 기억 속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서로의 입장과 상황에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마음을 헤아리고 다시 모두가 마음의 연결고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같은 여자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삶. 평범이라는 글 속에 자신을 가두어 놓기 위해 발버둥치는 삶, 사랑받지 못하는 삶.....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지금의 그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최선의 선택을 했고, 다른 선택지의 삶 역시 행복하리란 보장은 없다. 어떤 삶이든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를 바탕으로 결과에 책임지고 성장해나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한다. 내 선택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위안을 삶으며......

앞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 진지한 고민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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