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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_에리히 프롬

☆북리뷰

by mibbm_soo 2023. 3. 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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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p.28

삶을 사랑하건, 다른 사람이나 동물, 꽃을 사랑하건 모든 종류의 사랑에 적용되는 기본 원칙이 있다. 내 사랑이 적절하고 상대의 욕망과 본성에 맞을 때만 나는 사랑할 수 있다. 적은 물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라면 그 식물에 대한 사랑은 필요한 만큼만 물을 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식물에 무엇이 좋은지'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면, 가령 최대한 물을 만이 주는 것이 모든 식물에 좋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식물을 해칠 것이고 죽일 것이다. 나에게는 식물이 사랑받아야 할 방식대로 식물을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랑만 하는 것으로는, 다른 생명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식물이, 동물이, 아이가, 남편이, 아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상대에게 최선인지 정한 내 선입견과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면 내 사랑은 파괴적이다.

p.30

폭력이 반드시 신체적 위협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여린 마음이나 무지를 이용해 아이를 속이고 기만하거나 조종하는 심리적 방식도 있을 수 있다. 폭력은 특정 목표를 추구하지만, 상대가 정말로 저항할 수 없을 경우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 큰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폭력은 자신이 강하고 우월하고 힘이 세다는 사실로 합리화된다. 하지만 이런 합리화는 얼마나 기만적인가!(...)

폭력을 휘둘러 타인을 제 뜻대로 행동하게 만들려는 행위를 법이 제재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법은 폭력 앞에서 최소한의 보호밖에 제공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대부분 법이 폭력을 효과적으로 막아주지 못한다. 성인 아들이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갖겠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아들이 자기가 택한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그 결혼을 막기 위해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넓은 마음에 호소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해고하겠다고 협박하는 기업가, 학생에게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며 그러지 않으면 나쁜 성적을 주는 교사 등은 의식하건 안하건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폭력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위험한 부작용을 불러온다.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폭력 수단(재산, 지위, 명성, 탱크와 폭탄)의 크기를 자기 인성의 크기로 착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자기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수단의 힘을 키우는 데 모든 에너지를 투자한다. 그러면 폭력 수단의 잠재력은 커질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더욱 약해진다. 그렇게 일정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현실에 대처하며 수단의 성공에 전부를 거는 것뿐이다. 그는 활력과 흥미를 잃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도 못한다. 물론 그를 향해 경탄을 표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는 관심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흥분하면 생각 없이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성향이 있는지 알고 싶다면 가끔은 아주 자세히 지켜보아야 하고,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반응에 귀 기울이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더 나은 방도를 고민하려 노력하며, 폭력의 마음가짐을 버리고 활력과 인내심을 발휘하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늘 무슨 득이 될까 고민할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며, 어떻게 하면 긴장이 풀리는지, 어떻게 해야 불안과 경련이 해소되는지 관찰해야 한다.

p.37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다"고 말한다면 대부분은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안다. 그 말을 들으면 우리는 성장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그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것이 크고 힘이 세서가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의 눈과 피부에서는 무언가 뿜어져 나온다. 그의 내면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환하게 빛이 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삶을 사랑한다. 이런 삶에 대한 사랑이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 삶에 대한 사랑이 약해지면 사랑은 다시 사라지고, 두 사람은 왜 서로의 얼굴이 여전히 같으면서도 더 이상 같지 않은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p.40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삶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우리가 삶을 사랑한다면 삶의 과정이, 다시 말해 변하고 성장하며 발전하고, 더 자각하며 깨어나는 과정이 그 어떤 기계적 실행이나 성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하지만 과정보다 결과를 더 중요시하는 문화에서는 삶을 사랑하는 자세를 경험하기 힘들다. 사물을 생명보다 중시하고 수단을 목적으로 삼으며 심장이 필요할 때 이성을 사용하라고 채근하는 문화에서 말이다.(...)

고요를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은 없다. 사랑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다.

p.44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비법은 없지만 많이 배울 수는 있다. 망상을 버리고 타인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 계속 밖으로만 나다니지 말고 자신에게 가는 길을 배울 수 있는 사람, 생명과 사물의 차이를, 행복과 흥분의 차이를, 수단과 목적의 차이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폭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삶에 대한 사랑을 향해 이미 첫걸음을 뗀 셈이다.(...)

또 한 가지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삶을 사랑할수록 진리와 미와 삶의 온전함이 위태로워질까 봐 더 겁이 난다. 실제로도 그렇다. 특히 요즘엔 더 그렇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피하려고 삶에 무관심해봤자 고통은 더 커질 뿐이다. 정말로 우울한 사람은 슬픔의 감정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고통에서 건져주는 구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p.48

인간은 주변 사람 및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관계를 전혀 맺지 않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광기란 바로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 광기란 전혀 관계 맺지 않는 사람의 상태라고 말이다.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띨 수 있다. 전형적인 형태가 복종, 권력행사 혹은 마케팅 지향일 것이다. 마케팅 지향의 경우 관계는 시장에서 소비재를 교환하듯 지속적인 교환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식으로도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방식은 인간은 본성을 고려할 때 유일하게 만족을 준다. 사랑이란 그 사랑에 얽힌 사람들의 온전함과 현실을 모두 보존하는 유일한 형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복종하거나 그에게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사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사람은 자신의 온전함과 독립이라는 인간의 기본 특성을 상실한다. 진정한 사랑에는 타인과의 연관성과 자신의 온전함이 보존된다.

p.109

사랑의 조건은 혼자서도 제정신을 유지하며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자아의 강인함과 독립성, 온전함을 갖추는 것이다. 이 조건은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사랑받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사랑은 자발적 행동으로, 여기서 자발성은 말 그대로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을 말한다. 자아가 불안하고 나약하면 자기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자기 '대상'의 열정적 긍정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격정'이 아니라 자기 '대상'의 행복과 발전, 자유를 위해 매진하는 능동적 노력이다. 자신의 자아가 불구가 되면 이런 열정적 긍정이 불가능하다. 진정한 긍정은 항상 강인함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손상되면 사랑은 양가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자아의 강한 부분으로는 상대를 사랑하지만 손상된 부분으로는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리번이 생각하는 사랑의 특징은 사랑 받는 사람의 만족이 사랑하는 사람의 만족만큼 중요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p.238

실제로 '활동성'과 '수동성'이라는 두 개념은 20세기가 흐르는 동안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고전 고대(古典 古代)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도, 토마스 아퀴나스(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신학자)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스피노자도, 카를 마르크스도,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활동성'을 우리 안에 깃든 정신력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표현이라 여겼다. 우리 안에 깃든 정신력이란 이성, 감정, 미의 감수성을 의미한다. 활동성은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고, 강요된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에게 깃든 창조적 힘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탄생한다는 의미다. 

p.247

현대인은 매우 활동적이라 믿지만 실제로는 매우 수동적이다. 그의 활동성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지시하고 조종하는 활동성, 그에게 불어넣은 활동성이기 때문이다.(...)

지금 서구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과 행위가 무의미하고 즐겁지 않으며 일이 삶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의식하며, 명확하지는 않다해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의식하고 있다. 삶에 깊은 불만이 있으며, 내면의 수동성이 빚어낸 자신의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건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가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따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는 것이다.

수동성의 결과는 무엇일까?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누가 봐도 확실하며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바로 소비하는 강제, 소비하는 인간이 되라는 강제다. 소비하는 인간은 내면이 공허하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안으로 불어넣어야 한다. 수동성 탓에 실제로는 공허하지만 꽉 찼다는 허울을 선사할 물건으로 자신을 채워야 한다. 

실제 그의 분주함과 게으름은 같은 것이다. 즉 내면 활동의 결핍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강박적으로 활동하고 강박적으로 활동적이지만 그러고 나면 활동적으로 행동한 만큼 게으르고 싶다는 갈망을 느낀다. 물론 활동하고 나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역시 다른 형태의 강박적 활동성일 때가 많다. 운이 좋아 아무것도 안 할 수 있고 최대한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 사람도 아주 많다. 그것은 '휴식'이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휴식은 일과 마찬가지로 수동적이다. 수동적인 일과 수동적인 휴식, 이 둘은 딱 맞는 짝이다. 충분히 쉬고 나면 다시 문제가 고개를 내밀고, 아마도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 그러고 나면 다시 고민을 잊기 위해 일해야 한다.(...)

내가 이러한 고민을 하는 이유는 올바른 활동성을 키우라고 권하고 싶기 때문이다. 관조와 상반되지 않으며 자기 발전을 지원하는 활동성을 키우라고 권하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를 성공시키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우리가 생존하려면 지금처럼 그냥 살아가서는 안 된다. 제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수동성을 의식하고 이 수동성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깨달음이다. 다음 걸음은 진정한 활동성의 연습이다. 아마도 그 시작은 한번 가만히 앉아 바라보려는, 들어보려는, 명상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건 절대 쉬운 과제가 아니다. 말은 정말 쉬워 보인다. 가만히 좀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다. "그게 뭐 특별하다고.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 하지만 한번 해보면 당신이 얼마나 쉼 없는 행동의 강제와 분주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미쁨책방 이야기

책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내용은 생각보다 심오하고(?) 철학적이어서 쉽게 읽혀지진 않았다. 여러번 되풀이 해서 읽어 이해한 부분도 있고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스킵한 부분들도 있지만 대체적인 맥락과 의미를 이해하며 마무리하였다. '아마 다시 꺼내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는 건 다시 정독해서 미처 다 담지 못한 의미를 되새기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다음부터는 빨리 읽으려는 조급함을 좀 내려놓고 천천히 내용을 음미하며 읽어야 겠단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가끔씩 느껴지는 이 찝찝함이 싫기도 해서 ㅠ.ㅠ

무튼 이 책은 제목이 주는 메세지를 생각하게 한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와 어쩌면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진정한 '활동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살아남기가 더 힘든 세상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때론 내 목을 조르기도 하고 나의 쉼을 방해하기도 하면서 과연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좋아서 시작한 그 일도 조직 안에서는 그것이 변질되고 내 뜻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싫은 일이 되버린 순간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 과정 속에 있거나 그런 과정들이 또 나타날지 모른다. 이런 저런 걱정이 앞서다 보면 삶에 대한 불안과 무기력이 찾아오기도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에게 의미 있는 것에 포커스를 조금 더 맞추고 나의 내면에 더 귀기울이고, 적절한 방식으로 삶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한 지금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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