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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드보통_불안

☆북리뷰

by mibbm_soo 2022. 12. 3.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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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p.65

1830년대의 어린 미국을 돌아본 이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역사가는 새로운 공화국 국민의 영혼을 잠식하는 예상치 못했던 병을 분별해냈다. 미국인은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이런 부에도 불구하고 계속 더 많은 것을 요구했으며,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볼 때마다 괴로워했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 Democracy in America<>(1835)의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는 제목의 장에서 불만과 높은 기대, 선망과 평등의 관계를 끈질기게 분석한다.

"출생과 운에 따른 모든 특권을 폐지했을 때, 모든 사람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릴 때, 야망이 큰 사람은 위대한 일을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자신이 비범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을 통해 금세 교정되고 마는 망상이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p.67

이렇게 무제한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면 처음에는 특히 젊은 하인들 사이에 명랑한 분위기가 조성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가장 재능이 뛰어나거나 운이 좋은 사람은 목표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수는 상승에 실패한다. 토크빌은 그들의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울화 때문에 생기를 잃고, 자신과 주인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갔다.

 

p.108

경제적인 능력주의 사회에서 상속이나 다른 유리한 조건 없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개인은 과거 아버지에게서 돈과 저택을 물려받았던 귀족은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개인의 정당성의 요소를 확보했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 실패는 과거의 삶의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던 농민은 다행스럽게도 겪을 필요가 없었던 수치감과 연결되었다.

훌륭하고, 똑똑하고, 유능한데도 왜 여전히 가난한가 하는 문제는 새로운 능력주의 시대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이 답을 해야 하는(자기 자신과 남들에게) 더 모질고 괴로운 문제가 되었다.

 

p.109

부와 가난의 분배가 정의롭게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19세기의 사회진화론 철학보다 분명하게 표현한 사상은 없을 것이다. 사회진화론자들은 모든 인간이 처음에는 돈, 일자리, 존경이라는 빈약한 자원을 놓고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 경쟁에서 일부는 우위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부당한 이점이나 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뒤처진 사람들보다 본질적으로 나은 데가 있기 때문이다. 부자는 도덕적 관점에서는 그들보다 더 낫지 않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더 낫다. 그들은 더 힘이 세며, 그들의 씨는 더 강하며, 그들의 정신은 더 빈큼없다. 그들은 인간의 정글에서 생물학적 원리-19세기 맹종했던 새로운 신 같은 개념이었다-에 따라 다른 사람을 누르고 승리할 운명을 타고난 호랑이들이었다. 부자는 생물학적 원리가 원해서 부자가 된 것이고, 빈자 역시 생물학적 원리가 원했기 때문에 빈자가 된 것이다.

나아가서 사회진화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난과 이른 죽음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며, 따라서 정부가 개입해서 막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약자는 자연의 실수이며, 재생산을 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오염시키기 전에 소멸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동문의 왕국이 기형으로 태어난 짐승을 포기하듯이, 인간 세계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짓밟힌 자는 자비를 베풀지 말고 죽게 놔두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행동이었다.

 

p.112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의 등장 The Rise of the Meritocracy>(런던, 1958)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자신에게 모든 기회가 열려 있음을 안다······ 만일 되풀이하여 '바보'라는 낙인이 찍히면 허세를 부릴 수가 없다······ 이제는 자신이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는 달리 기회를 박탈당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에 말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p.119

우리의 지위는 '운'이라는 말로 느슨하게 얽어 넣을 수 있는 어떤 우호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기술을 갖추고 적당한 일자리에서 일하게 되는 것은 운 때문일 수 있다. 또 반대로 이런 유리한 상황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불운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결과를 운으로 설명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신의 힘과 자연의 예측 불가능한 변덕을 존중하던 시절에는 자신이든 남이든 사태의 흐름을 제어할 수 없다는 관념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래서 외적인 힘에 감사를 하기도 했고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악마, 도깨비, 귀신, 신의 역할을 자주 언급했다.(...)

우리의 지위의 문제를 우연적 요소에 맞긴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그러나 합리적 통제라는 관념에 완전히 물들어, '불운'이 실패를 설명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폐기해버린 세상에 산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다.

 

p.209

프로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1905)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농담을 통해 장애 때문에 공개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적의 우스꽝스러운 부분을 활용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계속해서 농담을 통하여 위험한 메시지가 "농담의 형태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않을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다.······[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농담을 특별히 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모두 희극적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정당화할 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것을 조롱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왕, 능력이 권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왕은 조롱한다. 인간적 본성을 잊고 특권을 남용하는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은 조롱한다. 우리는 조롱을 하고, 웃음을 통하여 불의와 과잉을 비판한다.

따라서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어지면 도덕적 목적을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이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고,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여러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p.229

2005년, 런던,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드니

 

성공한 사람이란 인종과 성별을 막론하고, 상업적 세계의 무수한 분야(스포츠, 예술, 과학 연구를 포함하여)의 어느 한 곳에서 자신의 활동(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을 통해서 돈, 권력, 명성을 축적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 사회이 기반은 '능력주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 성취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거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에 따라 경제적 실패 역시 능력에 따른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실업자는 전사들의 시대에 육체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처럼 수치를 느끼게 되었다. 돈에는 윤리적 가치가 부여된다. 돈은 그 소유자의 미덕의 증거다.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도 마찬가지다.(...) 부는 단지 높은 지위를 제공할 뿐 아니라, 늘 변하는 광범위한 소비재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여 행복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장려되기도 한다. 그런 소비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전 세대의 제한된 삶을 연상하며 동정심과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p.255

사회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선험적 진리로 여기는 견해들이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적 의식이 깨어난다. 그런 견해들은 자신만만하게 주창될 수도 있고, 나무나 하늘처럼 존재의 기본 구조에 속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어떤 정치적 관점에 따르면-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현실적 또는 심리적 이해관계를 옹호하고자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은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면 결코 지배할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리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편파적인, 어쩌면 비논리적이고 부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그저 오래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며, 오직 바보나 미치광이만이 여기에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p.285

18세기 중반 잉글랜드에서는 '묘지파'라고 알려진 일군의 시인들이 기독교에서 영감을 받은 이런 교훈을 되풀이해 강조했다. 그들이 묘지파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그들의 시의 화자가 달 밝은 맑은 밤에 교회 묘지에 나가 반쯤 허물어진 무덤들 곁에서 업적과 영광을 지워버리는 죽음의 힘에 대하여 명상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명상에서 별다른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기쁜 표정을 간신히 감추었던 듯하다. 에드워드 영의 시 <밤 생각 Night Thoughts>(1742)에서 화자는 이끼가 덮인 묘석에 앉아 과거의 위대한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한다.

 

현자, 귀족, 권력가, 왕, 정복자

죽음은 이들을 겸손하게 만든다.

왜 한 시간의 영광을 위하여 그토록 애를 쓰는가?

부의 냇물에서 거닐고 명성이 높이 치솟으면 뭐하는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도 "여기 그가 누워 있다"에서 끝이 나고,

가장 고귀한 노래도 "흙에서 흙으로"가 마무리를 하는데.

 

같은 시대의 시인 로버트 블레어도 역시 묘지를 배경으로 한 <무덤 The Grave>(1743)에서 똑같은 주제를 노래한다.

 

자만심이나 다른 사람의 아첨이

우리가 보통 수준 이상의 존재라고

교활하게 소곤거려도

무덤은 그 반질거리는 얼굴에 담긴 아부를 반박하며

솔직한 진실로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이것은 표지파 가운데 가장 유명한 토머스 그레이가 <시골 묘지의 비가 Elegy in a Country Churchyard>(1751)에서 되풀이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문장(紋章)의 자랑, 권력의 허세,

모든 아름다움, 모든 부가

똑같이 불가피한 순간을 기다린다.

영광의 길은 무덤으로 통할 뿐.

 

p.355~356

재능이 뛰어난 보헤미안들 덕분에 변덕스럽고 터무니없어 보일 수도 있는 삶의 방식이 진지하고 칭찬할 만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보헤미아는 법률가, 기업가, 과학자라는 역할 모델에 시인, 여행가, 에세이스트를 보탰다. 보헤미아는 이런 인물들 역시 그 기행(奇行)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으로 높은 지위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떠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일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난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미쁨책방 이야기

시대에 따라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이유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고, 깊이 있게 다룬 책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든 책이었지만 깊이 있는 문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책 표지 하단에 적힌 글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다' 라는 표현이 이 책을 대변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또 다른 욕망을 품고 사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조금 어렵게 느껴져 지나친 부분도 있기에 다시 한번 깊이 파고들며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더불어 알랭드 보통의 다른 책들도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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